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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Jan 11. 2024

다시 만난 세계.

내 브런치스토리의 소개글은 '다시 만난 세계'이다. 소녀시대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데, 이혼 후의 내 생활을 빗대어 쓰는 말로 적절한 것 같아서 붙여 넣었다. 다시 만났다는 것은 결혼 전의 내 세상을 또 한 번 마주했다는 뜻도 있다. 내가 혼자였을 때, 홀몸으로 세상과 부딪쳐 살았을 때의 그 느낌을 가지고 오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세계는 내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것은 울음이었고 그것은 슬픔이었고 그것은 불안이었고 그것은 비참함이었다. 이혼 후 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몇 년을 버텼다. 그러다 보니 벌써 이혼한 지 3년이 되어 간다. 난 며칠 후면 엄마아빠 집으로 이사를 해서 들어가게 되었고, 딸은 전남편에게로 갔다. 나는 몇 명의 남자들을 만났고 모두 헤어짐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내게 남은 건 수중의 돈 몇 푼, 내 집, 그나마 벌어먹고 사는 프리랜서 외주 일들뿐이다. 외주 일은 이제 들어오지도 않는다. 내가 꾸준히 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다. 아프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이유로 일을 거절하고 그게 몇번 반복되니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을 수밖에. 다시 만난 세계는 고통의 연속이었고 절망의 하루하루였다.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상상도 못하겠다.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내가 갑자기 보험설계사가 되어서 지인이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험을 파는 것. 아니면 직업 상담사 2급을 따서 직업 상담사가 되어 일을 하는 것. 혹은 공시를 준비하는 것. 아니면 커피를 파는 것. 모든 가능성들을 생각해 본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샀던 6만 원어치의 책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고, 헬스장을 2주 전에 끊어 놓고는 5번밖에 안 갔다. 끊겠다던 담배는 아직까지 피우고 있으며, 1일 1식은 잘 지켜지지도 않고 있다. 매일매일 사 먹는 빵은 내게 해로움을 주고, 매일매일 피우는 담배는 내 폐를 썩어들어가게 만든다. 어제는 하루종일 잠만 잤다. 눈을 뜨고 현생을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을 뜨고 생각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그냥 침대 속에서 누워만 있었다. 엄마에게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말이다. 모든 가능성을 세워 봤다가 지워 버린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내가 알고 있는 제일 나이 많은 친구를 보고 왔다. 그 친구(선생님)는 올해가 내게 안식년이라면서 일을 구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쉬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일을 해야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안정감이 난 지금 당장 필요하다. 그래서 여성새로일하기센터 같은 곳을 기웃거려 보았다. 3월 달에 교육이 시작되는데 여러 강의 중 끌리는 게 있어서 그걸 들을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때까지는 엄마아빠집에서 월세를 받고 빠듯하게나마 살아내야 할 것이다. 안식년이라. 내가 진정 안식년이라고 생각한 해가 있었던가, 싶다.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는 매일이 전쟁이었다. 작고 작은 아이를, 조금만 어떻게 해 보아도 부서질 것 같은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쳤던 육아. 그 와중에 전남편과는 하루 걸러 이틀 내내 싸웠고, 이혼을 하고 나서도 난 정신을 잃고 미친년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조울증은 잡히지 않았고 약을 바꿔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병원에 두 번이나 입원을 하고 반강제적으로 엄마아빠와 살게 되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한 번도 같이 살았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는 그 갑갑한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솔직히 그렇다. 그 누구도 내게 '엄마아빠집에서 같이 사는 일'이 잘못된 거라고 말을 안 하는데, 나만 그렇다. 나만 답답하고 갑갑하고 통제당하는 삶을 살거라 생각한다. 같이 사는 엄마아빠는 또 무슨 죄인가. 그들이라고 다 큰 40살 먹은 딸과 같이 살고 싶겠는가. 미쳤다고. 아픈 딸을 쳐내버릴 수도 없고, 진짜 이게 뭐 하는 짓들인가.


위화의 '원청'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린샹푸라는 사람의 전기 소설 비슷한 내용인데, 내용 중에 어떤 마을에 회오리바람이 불어 사람이 죽고 난리가 나는 장면이 있었다. 린샹푸는 사라져버린 아내를 찾아 젖먹이 딸을 데리고 마을에 막 도착한 참이었는데, 회오리 바람이 불어 딸을 그만 놓쳐버리고 만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딸을 찾았다. 그러다 어떤 나무 아래 걸려 있는 딸의 포대기를 본다. 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린샹푸는 기쁨의 눈물을 터트렸다. 나는 그 대목에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말았다. 린샹푸가 놓쳐버린 건 그의 전부였다. 린샹푸가 찾아낸 것도 그의 전부였다. 젖먹이 딸은 회오리바람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아 커간다. 아직 다 읽지 못해서 결말이 어찌 날지는 모르지만 린샹푸와 그의 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린샹푸는 사라져버린 아내를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살았다던 '원청'이라는 도시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찾고 있는 것도 아마 린샹푸의 원청이라는 곳이 아닐까. 사랑했던 아내가 살았던 도시. 이름도 흔적도 없는, 꿈 같은 도시. 꿈 같은 것. 환상 속의 그 무엇.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린샹푸의 의지를 닮고 싶었다. 그 북쪽에서 온 곰 같은 남자의 의지를. 환상을. 미래를. 덤덤함을. 성실함을. 하루하루 살아내게 하는 그의 희망을.


이사 준비가 한창이다. 오늘 주방 살림을 다 꺼내놓았는데 한숨이 푹푹 나온다. 저걸 어떻게 엄마집 살림과 합치지 이 생각뿐이었다. 요리도 안 하고 못하면서 무슨 냄비나 프라이팬이 이렇게 차고 넘치는지, 원. 컵은 또 왜 이렇게 많으며 잡다한 용기들도 한무더기였다. 본격적으로 이사하는 날은 13일이긴 한데, 이런 짐들은 미리미리 정리해 놓아야 이삿날에 덜 힘들다고 엄마가 한소리를 하셨다. 주방은 난장판이다. 냉장고 정리를 해서 쓸데없는 음식물을 모아놓으니 한 트럭은 될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냉장고를 거의 열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버릴 때다. 저버릴 때다. 저버리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을 때다. 그래야 산다. 그래야 내가 산다. 버리지 못하면 비워낼 수가 없다. 이사가 기회다. 이사를 하면서, 힘들게 몸을 쓰면서, 온 정신을 팔아야겠다. 마치 벼를 베는 농부처럼, 집 짓는 사람처럼, 힘차게 떡메를 들고 떡을 내리치는 사람처럼, 그렇게 온 정신을 팔린 채 비워내야겠다.


비워내지 못하면 미칠 것 같으니까.

온종일 같은 생각만 하면서 잠이나 잘 것 같으니까.

끊지 못하는 담배를 몇 번씩이나 부러뜨리고 버리면서도

다시 입에 물고 돌아오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나.

비워내지 못하면 미칠 것 같으니까 그렇다.

다시 만난 세계는 이제부터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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