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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야 Apr 28. 2024

새로운 것에 빠져 있다.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라는 시험을 준비 중인데, 필기는 합격했고 실기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국비 지원이라 무료로 듣는 수업인데,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샵, 인디자인 같은 어도비 프로그램들을 처음 접해 봐서 그런지 한참을 헤맨다. 그래도 남들보다 뒤처질 수는 없어서 하루 종일 그것만 붙들고 공부하는 나날들이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잡생각도 사라져서 좋다. 끊어진 인연들, 튀어나가려고 하는 일탈 잡념들에 대한 생각들이 펑! 하고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친한 지인은 다른 교육을 받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처지라(일을 하지 않고 있는 채로 교육을 받는 것) 자주 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오늘 그 지인이 나에게 창업에 관한 말을 건넸다. 내가 사업자 등록을 해서 외주를 받아 먹고 살면 그것도 하나의 길이라고.(아직 그럴 만한 실력은 전혀 되지 않지만) 나는 갑자기 새로운 세계에 발을 놓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교육을 시작할 때는 그저 자격증 따기 위한 단순 교육이라고만 여겼는데, 뭔가 전인미답의 길을 파헤쳐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길이라면 가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신기하다, 내가 받고 있는 교육이.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심리상담사 선생님을 만나서 1시간 상담을 받고 왔는데,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 몇 년간은 미야 씨가 좋아할 만한, 관심 가져 볼 만한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 치 앞밖에 못 보는 성격이라 올해 당장 취업 준비를 해서 일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심리상담사 선생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내게 뭘 자꾸 배워 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나는 지금 월세를 받아 먹고 살기 때문에 당장 돈을 벌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마냥 놀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던 차였다. 그런데 엄마와 선생님은 잠시 멈춰서 내게 좋은 것들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뭔가 해방된 느낌이었다. 전남편에게 아이를 보내기 전에는 육아에 치여서 못했던 것들이 사실 많았다. 아무리 어린이집에 가는 시간이 있다고 해도 아이를 챙기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나는 멀티가 안 되는 성격이라 육아와 교육받기, 일하기 등을 동시에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딸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지금이 기회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작은 희망이 생겼다. 경제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나의 가장 나이 많은 친구가 내게 책을 하나 보냈다. 제목은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이다. 엄마는 항상 내게 말했다. 넌 얼마든지 좋은 사람 다시 만날 수 있어. 네 건강을 회복하고 네가 안정적으로 산다는 전제하에, 결국 네가 좋은 사람이 되고 난 후에야 꼭 그런 사람이 나타날 거야.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네 자신에게 집중해야 할 때야, 하고. 그 나이 많은 친구도 내게 말했다. 안식년에는 굳이 남자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아요. 자신을 돌봐요, 라고. 곧 이혼 3주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나는 내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았던 게 아닐까. 내 내면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저 절망의 늪에 빠져 가만히 누워만 있는 걸 오히려 즐겼던 건 아닐까. 무언가에 빠져 정신없이 집중했던 때가 대체 언제였던가 싶다. 요즘의 나는 거의 자격증 준비에 매진하여 온 힘을 다 쏟고 있다. 새로운 프로그램들의 기능을 익히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며 노력하고 있다. 이런 내 모습이 나는 좋다. 조울증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배정규라는 교수님의 말처럼 인생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살은 빠지지 않았고 또 이런저런 고쳐지지 않는 습관들도 많지만 나는 지금 내 삶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아주 좋은 모습인 것 같다. 그리고 쓸데없는 인연을 기어코 끊어낸 것도 잘한 것 같다.(전남친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별로 쓰고 싶지 않아서 이만 줄이겠지만.


일러스트레이터는 주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고 포토샵은 이미지 편집을 담당하는 프로그램이며, 인디자인은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이다. 세 개의 각기 다른 프로그램을 한 번에 습득하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책을 따라가며 하나씩 해보고 결과물이 나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내가 만든 이미지들이 여러 효과들로 편집되고 결과적으로 인쇄되어 나오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은 왕초보에 스스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하나씩 해보련다. 컴퓨터그래픽스운용기능사 실기 책이 두 권인데 벌써 한 권은 다 뗐고 다음 권은 절반 이상 나갔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어제는 11시간 동안 예습을 했다. 나 스스로도 내가 그렇게 독한지 몰랐다. 중간중간 진도가 안 나갈 때, 막힐 때는 유튜브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해결하고, 교육생들 단톡방에 묻기도 하면서. 자체 쉬는 시간에 담배를 뻑뻑 피워 가면서. 간식으로 쑥설기를 뜯어 먹어 가면서. 나는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 완전히 빠져들어서, 뭔가 이토록 집중해서 해본 게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다. 몸은 힘들지만 행복하고 뿌듯하다. 실기 시험 첫 번째에 붙을 생각은 전혀 없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필기를 합격했으니 2년간은 필기 면제다. 그동안 잘 준비해서 실기를 합격하고, 각각의 프로그램들을 더 고차원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빠져들어 공부하고 싶다.(벌써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책들만 4권이다)


길고 길었던, 험난했던, 내게 해가 되었던 인연을 끊고, 내게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없애 버리고, 한마디로 내 삶의 한구석을 싹싹 쓸어 청소했더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난 여전히 글쓰기를 사랑하고 독서를 사랑한다. 그런 내 삶에 새로운 게 들어왔다. 실기 공부를 하면서 미술학원도 다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면 구현할 수 있는 이미지가 더욱 풍부해질 테니까. 욕심이 생긴다. 잘하면 이걸로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인의 말에 조금 들뜨기도 한 것 같다. 엄마는 요즘 평안하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잘 지내서, 내가 자리잡고 살아서 그렇다고 했다. 내가 불안정하고 내가 방황하면 엄마도 똑같이 불안정하고 방황한다. 엄마와 나는 영혼을 마주한 두 존재다. 엄마를 위해서 내가 사는 건 아니지만 조울증을 앓고 있는 무직의 40대 여성을 딸로 두고 매일 밥을 해주며 건사해야 하는 60대 노인의 삶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 나는 나를 위해 살 것이다. 엄마를 위해서도 아니고, 딸을 위해서도 아니다. 둘 다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존재들이지만 내가 먼저 살아야 두 사람들도 살 수 있다. 행복해질 수 있다. 방황은 끊고, 불안은 던져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푹 빠져들어 살고 싶다. 언젠가 멋지게 변할 나를 위해, 나는 내일도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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