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참나무 예찬”이라는 칼럼을 읽었습니다. 필자인 김진하 시인은 혹한의 겨울 아침저녁으로 아궁이 앞에 앉아서 군불을 때는 소회를 적으면서 장작으로 일품인 참나무에 대해서 예찬합니다.
“불땀은 단연 참나무가 으뜸. 참나무는 송진이 밴 소나무보다 불이 더디게 붙지만, 일단 불이 붙고 나면 화력이 세고 이글거리는 참나무 알불은 혀를 대보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다.” - 칼럼 ‘참나무 예찬’ 중에서
https://www.nongmin.com/article/20240124500531
시인의 글을 따라 잠시 유년의 아궁이 앞으로 달려갑니다. 불땀은 땔나무에 있어서 불기운이 세고 약한 정도를 말합니다. 불을 때 봐야 불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무에 따라 불땀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무가 습기를 머금은 정도 등에 따라서 그날 그날 불땀이 바뀌기도 합니다. 굴뚝에 연기가 잘 빠지지 않는 비 오는 날은 불쏘시개로 마른 나뭇잎을 아무리 넣어도 불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런 날은 불땀도 덩달아 약해집니다.
지금은 시골도 기름보일러로 아침저녁으로 군불을 때는 집이 많지 않지만 예전에는 겨울 저녁 4시 30분 경이면 집집마다 여물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불기운은 아궁이 위에 큰 가마솥 여물을 데우면서 구들방도 함께 데웠습니다. 돌아 생각해 보니 우리가 먹을 밥보다 소가 먹을 여물을 끓이는 일이 항상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소여물을 펄펄 끓이면 안 되니 어느 정도 따뜻해지면 아궁이의 불을 옆 아궁이로 옮겨 저녁밥을 준비합니다. 한쪽 가마솥에는 보리밥이 익고 있고, 조금 더 큰 옆 가마솥에는 따뜻한 물이 끓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아궁이 앞에 앉는 것은 잠 때문에 힘들었지만 오후 4시 30분경 여물을 끓이려고 아궁이 앞에 앉는 것은 주로 제 일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출타 중이 아니시면 하지 못 하는 그 일을 저는 참 좋아했습니다. 한때 나에게 혹 불을 좋아하는 나쁜 마음이 들어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적도 있었지만 저는 불 앞에 혼자 앉아 있는 그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가으내 거두어다 둔 솔잎, 참나무 잎들로 불쏘시개를 했는 데 불이 쉬 붙지 않으면 언니에게 자리를 뺏길 수 있어서 조바심을 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그때 땔감으로 썼던 나무들이 어떤 나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끔 소나무가 땔감으로 쓰이는 날은 송진에서 나오는 그을음으로 글 장난을 하기도 했습니다.
통으로 되어 있는 나무들은 누군가 베어서 쪼개어 주어야 땔감으로 쓸 수 있습니다. 동생과 재미 삼아 나무들을 톱으로 베어 본 기억도 떠오릅니다. 도끼로 나무를 쪼개 보겠다고 몇 번 설쳤던 기억도 떠오르는 데 무서웠다는 감정만 남아 있습니다. 시골 남자는 장작도 거뜬히 팰 수 있어야 진정한 남자였습니다.
지금은 결혼할 때보다 10kg 이상 쪄서 살도 좀 있는 남자가 되었지만 결혼할 때 남편은 키도 작고 왜소해 보였습니다. 삼 남매의 증언으로 이쁘다고 차별받던 셋째 딸이 결혼하고 싶다고 데려온 남자가 왜소해서 아버지는 좀 실망하신 듯하셨습니다. 결혼을 하고 처가에 간 남편이 장작을 패는 모습을 보고 사뭇 놀라셨지요. 츤데레 남편은 처가에 가면 소파와 한 몸인 형부와 달리 집 주변 나무 전지도 하고 장작도 패곤 해서 아버지께 은근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두 아버지를 잃은 남편은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이제 아버지가 없네.”라고 말해서 아픈 제 맘을 더 아프게 했었답니다.
지금도 길을 가다 베어진 나무들을 보면 ‘저거 땔감으로 쓰면 잘 타겠다.’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유년의 기억이 무섭습니다. 글 하나의 힘이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글 하나가 우리를 몇 십 년 전 과거로 이끌기도 하고 몇 백 년 전으로 타임슬립하게 하기도 합니다. 오랜 시간 살아남은 글과 그 시간만큼 살아온 나무, 땔감으로 쓰여 소멸된 나무들에 대해서 생각이 많은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