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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고걷는 최선화 Aug 28. 2024

공원의 어느 아침

식물의 재발견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여는 사람은 나다. 그런데 요즘 그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둘째 아들이다. 출근 전 헬스를 다녀오거나 공원을 달리려고 일찍 일어난다. 오늘도 그에게 1등을 빼앗겼다. 노트북을 켜고 아침 일과를 서둘러 하고 있는 데 그가 들어와 한 마디 한다.

“바람이 달라요.”


서둘러 양말을 신고 사방으로 뻗은 머리는 모자로 숨기고 현관을 나선다. 공동현관문을 여는 순간 온 몸에 전해지는 공기가 다르다. 뜨겁지 않고 시원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주는 선물일 수도 있고, 너무 더웠던 날들이 이어져서 조금 서늘한 바람이 불어도 느낌이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잠시 바람을 느껴본다.

공원 가는 길 텃밭에 심겨진 참깨 꼬투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키도 어느 새 나를 넘어섰다. 사방으로 뻗은 잎사귀들이 잎을 쫙 펴고 햇살을 받느라 정신이 없다. 아직 꽃을 달고 있는 참깨는 오늘 아침따라 의기소침해 보인다. 8월 덥고 습한 날씨에 게으름을 부리지 말고 일찍 일어나 햇살을 받을 걸 하고 후회하나보다. 곧 너도 꽃 진 자리에 꼬투리가 생기고 쑥쑥 자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려다 참깨 스스로 알아갈 것을 알기에 입을 꾹 다물고 걷는다.

공원이 부산스럽다. 가장 시끄러운 건 은행나무다. 잎도 키우랴 열매도 키우랴 여간 바쁜 게 아니다. 새벽에 불어온 선선한 바람이 무더워서 안 올 줄 알았던 가을이 올 거라고 귀띰을 해 준 모양이다. 마주보고 서 있는 단풍나무가 한 두 해 맞는 가을도 아닌데 오늘 아침따라 왜 이리 부산스럽냐고 한 마디 하지만 은행나무한테는 들리지 않나보다. 이럴 때는 제풀에 지쳐서 차분해 질 때까지 그냥 두는 수 밖에 없다.  

마가목 열매는 노란색이 더 짙어져서 황금색으로 변했다. 어떻게 황금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해 가는지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싶다. 혹 마가목 열매가 말을 줄 안다면그 옆에서 밤새도록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뜨겁던 여름을 이겨낸 공원의 열매들은 더 빛이 난다.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익어가는 열매를 이야기할 때 산딸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연두빛으로 작게 자랄 때는 자라서 어떤 모양이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축구공처럼 동그란 것에 오각형 선을 만들어서 빨간 꼭지를 하나씩 달고 있는 모습은 경이롭다. 노란 열매가 빨간빛으로 변해가면 새들의 먹이로 내어준다. 간밤 누군가 나뭇가지를 하나 부러뜨렸다. 아직 덜 익은 산딸나무열매들이 떨어져있다. 호기롭게 덤빈 누군가 때문에 새들의 먹이가 아깝게 되었다.

산딸나무의 애사(哀事)를 뒤로 하고 작살나무열매를 보러 간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보랏빛이 짙어진다. 작살나무 열매는 연두빛에서 녹색으로 그리고 연보라빛에서 보랏빛으로 바뀌어간다. 대부분 줄기쪽에서 시작해서 가지 끝으로 색깔이 물들어가는데 열매가 모두 보랏빛으로 물들고 나면 고혹함이란 단어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8월말의 공원은 후각의 시간이 아니라 청각의 시간이다. 아침 공원에는 새알매미와 풀벌레소리가 가득하다. 거기에 일찍 깨어난 까치들까지 소리를 보태면 내가 있는 곳이 도시 한복판인지 시골 오솔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럼 잠시 다른 공간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나를 떠나게 하는 것도 풀벌레 소리였지만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것도 그것이다.


“밥 됐나요?”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공원에 아직 둘러볼 것들이 많지만 바람이 다르다고 알려준 아들의 아침식사를 챙기러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모과나무, 감나무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못 했고, 팥배나무와 피라칸타나무의 열매도 얼마만큼 자랐는지 보지 못 했다. 아무 것도 걸릴 게 없는 어느 아침에 공원에 나를 풀어두면 집에 안 가려고 주인과 씨름하는 개처럼 공원을 빙빙 돌고 있을 것 같다. 가끔 찰칵~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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