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경의 황혼> 리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57년 작품 <동경의 황혼>은 흑백 화면 속에 담긴 동경의 풍경처럼,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화이다.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섬세하고 정적인 연출은 오즈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욱 어둡고 냉혹하다. 하지만 그 속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면 고독 사이에서 빛나는 삶의 의지를 마주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50년의 동경을 배경으로 한 <동경의 황혼>은 아버지의 시선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둘째 딸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둘째 딸 아키코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히 다뤄지지 않지만 아버지의 사랑에도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과 결핍감을 안고 살아간다. 어머니의 빈자리가 아키코의 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요즘, 아키코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다. 취직도, 결혼도 정해지지 않은 채, 부쩍 자주 외출하여 늦게 돌아온다. 아키코는 누군가를 찾아다니는데, 동네 사람이 모두 알 정도로 아키코는 '겐조'라는 남자를 수소문한다. 덜컥 임신한 아키코는 겐조와 상의하고 싶어 하지만 겐조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닌다. 가족 몰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았다.
겐조는 같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도 책임을 미루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지독하게도 못된 남자이다. 흠씬 때려줘도 모자랄 만큼 볼품없는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걸고 오히려 자신이 힘들다고 말한다. 소문도, 책임도 오롯이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녀에 대한 '소문'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가족 외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가족은 좋은 가문에 시집보내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래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었던 그녀는 끝내 지독한 굴레에 빠지고 만다.
일본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시선은 특히 '아키코'를 통해 더 잘 드러난다. 특히 전통적인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키코가 겐조를 찾아 나설 때, 사람들은 도와주기는커녕 그녀의 이야기를 가십거리로 여긴다. 폭력적이진 않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상당히 무례했다.
<동경의 황혼>은 겉으로 문제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급속도로 붕괴되어 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낸다. 그리고 가족 사이의 단절을 표면으로 드러냄으로써 현대사회의 '가족'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영화는 대물림되는 사랑의 실패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모 세대의 사랑의 실패가 자녀 세대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실패가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부모의 사랑이 온전히 전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남이 되기는 쉽지만 가족이 되는 것, 즉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진정한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타인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보통'을 따를 수밖에 없는 '전통'의 굴레에 대한 갈등과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어떤 노력보다는 혼란스러움이 팽배한 모습이다. 전통에 따를 수밖에 없는 사회적 인식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도, 전통에 거슬러 올라갈 때, 고통과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오래된 영화임에도 현대사회와 많이 닮아있다는 것은 다소 씁쓸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흐름은 분명히 긍정적인 부분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창밖을 내다보게 되는 그 마음처럼 <동경의 황혼>은 계속 되돌아보게 되는 처연함이 묻어 나오는 영화다. 누군가 죽어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무게를 느끼게 만들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고독과 슬픔, 그리고 희망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일본의 풍경과 가족의 모습이 '흑백'으로 담겼지만 왠지 모를 색채감이 느껴진다. 왜 오스지로 감독이 흑백영상을 고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흑백으로 가득한 화면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영화의 분위기가 더욱 섬세하게 표현된다. <동경의 황혼>은 어둠이 자욱한 분위기에도 아름다움이 도드라지는 영화다. 이토록 씁쓸한 가족의 황혼은 해가 져도 지속될 우리의 인생처럼 흘러간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계속 살아가야 하고, 과거에 연연하지 말아야 무(無)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삶이란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일부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영화 <동경의 황혼>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이다.
<동경의 황혼>은 <동경 이야기>를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영화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패망한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일본 사회의 모습과 가족 이야기를 다룬 영화 <동경 이야기>는 <동경의 황혼>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과오를 외면한 채, 일본은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 뒤에는 심각한 사회적, 개인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극도의 불안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동경의 황혼>에서는 빠른 경제 성장 속에서 전통적 가치의 보수성과 변해가는 시대상이 충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일본 사회가 극도로 감추고 싶어 하는 '불안'은 그대로 드러나고 감출수록 더 선명하게 부각되는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 개중에 개인의 불안감은 극도로 억눌려 결국 표출되는데, 그 모습을 '아키코'라는 인물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또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는 '나'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이러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메시지가 개인으로도, 사회로도 맞닿아있었다. 이 영화는 결코 실패작이 아니다.
https://brunch.co.kr/@mindirrle/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