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necting the dots #2 San Marino
내 인생 최고의 파스타 두 그릇을 만난 건, 모두 산마리노로 떠난 그 하루였다.
이탈리아를 그렇게 여행했건만! 우연히 연달아 만나버린 최고의 파스타,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했던 비!
Connecting the Dots #2
San Marino ( Country ) - Pasta ( Food )
나라라고 해야 할지 도시라고 해야 할지.. 난감한 존재감의 여행지, 산마리노.
그리고 영혼의 위로를 주는 음식, 파스타!
산마리노에서의 짧았던 하루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내 인생 파스타.
( tmi: 칵테일 사랑을 들으며 쓰는 중.. )
나는 파스타를 정말 좋아한다. 한국에 있을 때도 좋아했지만, 이탈리아에 잠깐 살아본 후 파스타를 더욱 좋아하게 됐다. 한국에서 맛본 파스타는 어쩐지 화려하다는 이미지가 강했지만, 본토의 파스타는 화려하다기보다는 백반(?)같이 소박하고 든든한 이미지를 가졌다. 화려하지 않아도 소박하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이 깔끔한 한 접시의 음식은 탄수화물만이 줄 수 있는 (?) 영혼의 위로를 한가득 담고 있다. 어떤 때는 상쾌하고 유쾌한 맛을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 면을 잔뜩 퍼먹다가 목이 메어 죽어도 좋을 것 같다' 싶게 꾸덕하고 먹먹한 맛을 내기도 한다. 간단한 조리법과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와 맛. 정말 최고의 음식이다.
참고로 정통 이탈리아 파스타는 모든 재료를 한 번에 넣고 볶지 않는다. 파스타나 리조또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가급적이면 따로 볶고, 면과 소스를 함께 섞어준 후에 마지막에 따로 익혀둔 재료를 추가해 각 재료의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이 최고의 조리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들어가도 되는 재료 조합에 있어서 굉장히 엄격한 편이다.) (음식에 자부심을 가지는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든다.)
어딜 가더라도 파스타를 맛볼 수 있어서였을까,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못해도 정말 100 그릇쯤 되는 파스타를 먹었을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파스타를 고르자면 생각나는 두 그릇의 파스타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같은 날 먹었다. ( 양심적으로 내가 만든 파스타는 뺐다. 근데 눈 돌아가게 맛있으니 언젠가 소개하겠다.) 그 날이 바로 산마리노로 여행을 떠났던 날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산마리노하면 근사한 풍경, 그리고 .....아니 사실 파스타만 떠오른다.
사실 처음 산마리노가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산마리노. Marino라고 하면 바다의 느낌이 팍팍 나는 것이, 왠지 아쿠아마린 향이 떠오르고, 인어공주가 연상되고 그렇더라. 귀엽고 마음에 드는 이름이라 처음 여행을 결심했다. 하지만 산마리노는 바다가 아닌 산지에 있는 도시였고,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나라였다. 하지만, 산마리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산마리노는 이탈리아 안에 자리 잡은 정말 작은 국가(microstate)다. 유럽에서 3번째로 작은 나라이고, 세계에서는 5번째로 작은 나라다. 바티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산마리노라는 이름만 들어서는 모나코처럼 왕족이 통치하는 왕국이 떠오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과거 대부분 독립된 국가였던 것처럼, 산마리노 역시 많고 많은 왕국 중 하나로, 독특한 사연으로 우연히 따로 나라를 차리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마리노는 더 근사한 사연이 있는 공화국이었다.
산마리노는 왕국이 판을 치던 시대에 종교와 군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등장한 공화국이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당시,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나폴레옹의 제안을 거절한 산마리노는 그 공을 인정받아(?) 독립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었던 주세페 가리발디가 위기를 맞이했을 때 산마리노가 그의 은신처가 되어주었고, 그 결과 산마리노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독립된 국가로 존재할 수 있었다. 겪어본 바로는 바로 옆인 이탈리아의 도시 리미니와 산마리노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독립된 국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산마리노는 참 독특한 나라다. 심지어 고대 로마의 집정관 제도도 아직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름만 들어서는 왕족이 사는 작은 나라 같지만, 의외로 민주주의가 일찍이 자리 잡은 대단한 나라였던 것이다.
사실 워낙 작은 나라라, '작은 나라'라는 것을 셀링포인트로 삼은 관광지로서의 느낌이 강하다. 작은 나라라는 사실이 신기하긴 하지만, 솔직히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그저 경치가 좋을 뿐. 거의 하이킹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르막길이 많은 곳이지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아름다운 경치를 만날 수 있어 좋은 여행지였다. 하지만 꼭 특별해야지 좋은 여행지가 아니다. 그냥 내가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여행지가 아닐까?
리미니로 떠난 김에 하루 짬 내서 버스를 타고 방문하기로 한 산마리노. 나의 산마리노 여행은 그저 평범한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가이드의 말을 듣고 흥미가 생겨 산마리노에 대해서 공부를 조금 했던 것 이외에 그다지 기억나는 특별함은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특별함이 없었던 덕분일까.. 산마리노는 변덕스럽던 날씨와 멋진 경치, 그리고 맛있는 파스타로 기억된다. ( 먹보 같은 소리만 늘여놓네요.. )
버스가 산마리노에 도착했을 때 본 경치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날씨는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딱 좋은 6월의 날씨였다. 고층 건물 틈바구니에서 탁 트인 하늘 한 번 보기 힘든 서울의 빌딩 숲과 미세먼지에 찌들어서일까, 산마리노의 신선한 산 공기와 탁 트인 경치는 거의 해독제처럼 뭉친 속을 뻥! 뚫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해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정말 중세시대로 타임슬립을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약간 베르가모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베르가모는 아직 세상이 얼어있던 2월에 갔기 때문일까, 산마리노는 베르가모와는 비교도 안되게 멋졌다. 오르막길을 걷는 건 딱! 질색이지만, 이런 멋진 경치를 놓칠 수는 없겠다는 생각에 기운을 내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보통 오르막길을 걸을 때는 '지금은 힘들어도 정상에 도착하면 보람찰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걷기 마련이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산행(후문에서 도서관 올라가는 길)은 그랬다. 오르막길은 걷다 보면 숨도 차고 목도 타지만, '저기까지만 올라가서 물 마시자', '어디까지 올라가면 잠시 쉬자' 이런 식으로 혼자 목표를 설정하고 나도 모르게 스파르타식으로 걷게 된다. 아무도 신경 안 쓰더라도 나 혼자 옆 사람과의 묘한 경쟁심에 불타 조금씩 스피드를 내며 무리해 걷기까지 한다.
하지만 산마리노의 오르막길은 달랐다.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천천히 걷는 과정은 말 그대로 힐링이었다. 산마리노의 중심도시는 너무 작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서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 한몫했다. 여유를 가지고 걷는 산마리노의 길은 너무 아름다웠고, 시간이 갈수록 푸르게 변해가는 하늘도 제법 멋졌다.
계속 위로 올라가다 보면 산 위를 둘러싼 성벽들이 나타난다. 정확히 성벽이 맞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말 옛날에 한참 유행하던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의 배경이 이런 곳일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정말 중세 유럽에 온 듯한 기분이 마구 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오르막길과 수많은 돌계단은 기본이요, 성벽의 탑으로 들어가는 조그마한 아찔한 나무 계단도 잔뜩 있다. 다소 열악한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이렇게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중세 산마리노를 지키던 경비병이 된 것만 같은.. 컨셉의 늪에 빠지게 되는 멋진 풍경이다.
아차, 산마리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가 바로 이름 모를 꽃의 맞은편에 있던 이 작은 가게였다.
나는 그라니타(Granita) 쳐돌이다. 그라니타는 슬러시 같은 음료로 이탈리아의 여름을 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 특히 이탈리아는 레몬이 많기 때문에 레몬 그라니타가 정말 정말 맛있다. ( 다른 그라니타는 색소와 시럽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 레몬 그라니타는 직접 만드는 곳이 많은 것 같다. 먹보의 빅데이터 ) 그라니타 어디 없나,, 하던 차에 정말 잘생긴 이탈리아 청년이 그라니타를 팔고 있길래 망설이지 않고 그라니타를 샀다. 그라찌에~하면서 웃어줬더니 내 심장이 녹았다....
원래 여행지에서 문득 마주친 잘생긴 사람들이 은근 뇌리에 팍! 하고 박히는 법이다. 뜬금없지만 저는 밀라노 두오모역 안에서 조쉬 하트넷의 리즈시절을 쏙 빼닮은 남성을 본 적이 있습니다. ( 자랑 ) 그 사람에게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뻥 안치고 (사실 뻥이지만) 귓가에 Damien Rice - The Blower's Daughter 재생되는 줄 알았잖아요.....
친구와 열심히 걸어 탑을 찍고 다시 광장과 상점이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광장 옆에 늘어진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앉아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오자마자 아까의 깨끗한 하늘이 무색하게 소나기가 미친 듯이 퍼붓기 시작했다.
천막 아래 야외 공간에서 밥을 먹었던 터라, 바닥에서 튀어 오른 빗물이 옷을 적실 정도였다. 당일치기 여행인지라 산마리노를 돌아볼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짜증이 날 법도 한 상황이었다. 비는 오고, 우산은 없어 식당에 꼼짝없이 발이 묶인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파스타가 너무 맛있었던 터라 모든 기억들이 미화되었다. 당시에도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렇게 단순해도 될까 싶게 그저 맛있는 기억과 멋진 풍경들만이 떠오른다. ( 또 먹보 같은 소리.. )
대단할 것 없는 이 파스타는 산마리노 지역의 특산품도 뭣도 아니었다. 그냥 식당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종류별로 준비된 많은 파스타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산마리노에 딱! 하루 머무른 내가 우연히 이 식당에 들어가 앉은 후, 많고 많은 파스타 중 이걸 딱 골라서 먹었다는 사실이 이 파스타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어거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말린 체리 토마토와 바지락이 들어간 이 파스타는 오일 파스타의 정석과도 같은 맛이었다. 개인적으로 파스타는 면과 소스의 조화, 그리고 텍스쳐가 중요하다고 본다. 소스의 맛이 아주 강하지 않은 오일 파스타는 그렇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제일 어려운 파스타가 아닐까 싶다. 재료 고유의 맛을 잘 살리고, 균형을 잘 살려야 하니까! 이 파스타로 말하자면, 면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것이 계란이 많이 들어간 신선한 느낌이었다. 탄수화물이 주는 푸근함에 조개의 감칠맛, 새콤달콤한 말린 토마토까지 정말... 장난 아닌 파스타였다. 그리고 올리브 오일에 미쳐 사는 이탈리아인들이지만, 이 파스타는 먹고 난 후 그릇에 기름이 전혀 고이지 않았다. 아직도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이 난다. 화이트 와인을 같이 마셨는데 어찌나 행복하던지...
본인이 뭐 대단한 음식 평론가는 아닌지라, 뭐가 어떻게 좋은지 글로 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정말 맛있는 오일 파스타는 정말 입에 막 쑤셔 넣게 되는 묘한 끌림이 있다. (?) 이걸 먹다가 숨이 넘어가도 좋을 것 같은.. 멈출 수 없는 그런 기분... 그리고 이 파스타는 먹기 번거롭게 이렇게나 조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말 그대로 흡입했다.
짜잔. 빈 그릇으로 증명하는 파스타의 맛.
두 번째 감동의 파스타는 산마리노를 떠나 다시 리미니에 돌아와서 맛볼 수 있었다. 친구가 미리 찾아둔 가게는 아쉽게도 웨이팅이 너무 많아 근처를 걸어 다니다가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적당히 골라 들어갔다. 저녁 코스를 시켰는데, 코스에는 와인 한 잔과 프리모 (Primo: 보통 파스타나 리조또), 그리고 세콘도 (Secondo: 메인 디쉬. 주로 육류 혹은 생선 요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가격은 30유로 전후였던 것 같다.
처음 가게에 들어갈 때는 자리가 많이 있었는데, 식사를 하다보니 비가 퍼붓기 시작하고 시간이 늦어지자 점차 동네 주민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마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 여기도 제법 맛집인가 보군..' 하며 안도했다.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 나올지 감이 잘 오지 않았던 프리모. 3가지 해산물을 이용해서 만든 3가지 파스타였다. 오른쪽은 비스큐 같은 맛이 진하게 나는 딱새우 파스타였고, 왼쪽은 참치 같은 식감의 무언가와 토마토소스였다. 사실 친구랑 이게 무슨 생선인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했지만 결론이 기억나지 않는다. 가운데는 대구살이 들어간 크림소스로 만든 토르텔리니였다.
세 가지 파스타 모두 비슷한 듯 다른 맛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아직도 기억난다. 너무 맛있어서 한참을 감탄하며 파스타를 열심히 먹어치웠다. 양도 정말 많아서 다 먹기 힘들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리미니 인심.... 그런데 파스타를 먹다 보니 또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폭우라고 해도 될 정도로 꽤 많은 양의 비가 내렸고, 심지어 천둥번개까지 쳤다. 그렇지만 밥이 맛있어서일까, 마냥 로맨틱한 식사로만 기억에 남는다. 이번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비가 튀기는 자리에 앉았다. 식당 내부보다 바깥이 더 경치가 좋은 것 같아서 그랬는데..
독특한 구조의 식당이었어서 여기가 실내인지 실외인지 헷갈릴 정도로 나무 창틀 사이로 비가 내리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렀다. 리미니 도착 첫날 저녁에는 더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비가 내린 덕분에 밤은 참 시원했다.
비를 구경하며 파스타를 열심히 먹었고, 곧 이어 세콘도가 나왔다. 세콘도로 나온 건 바다를 끼고 있는 동네면 어디든 다 있는 메뉴, 바로 프리또 미스또 디 뻬쉐 (Fritto Misto di pesce)였다. 모둠 해산물 튀김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구성은 동네마다 다르다. 보통은 오징어, 새우, 이름 모를 통통한 멸치 같은 생선, 뭐 이 정도로 구성된다. 이 가게는 애호박과 당근을 썰어서 같이 튀겨줬고, 분식집에서 먹는 야채튀김처럼 달큰한 것이 단조로운 해산물 튀김 사이 포인트가 되어줘서 정말 맛있었다.
Fritto misto의 misto는 mixed라는 뜻이다. 이미 파스타로 어느 정도 배가 차 버린 나는 약간 심심해서 튀김을 종류별로 잘 정리해봤다. 따라서 이 요리는 이제 Fritto di pesce일 뿐이다. misto는 나의 정리로 인해 사라졌다. ( 이런 짓 한다고 친구들에게 욕 많이 먹었다. 동시에 만족스러워한 친구들도 있었기에 I'm fine.. ) (그리고 사실 잘 정리해도 fritto misto는 fritto misto다. 모둠 튀김이니까..대충 언어유희.. )
이렇게 온통 먹는 얘기만 늘여놔도 되나 싶지만, 이게 나의 산마리노 여행의 기억들이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곤 콕 찝어서 말하기 어려운 거리의 풍경, 예쁘던 꽃들, 변덕스러운 날씨와 끝내주게 맛있던 파스타 두 접시! 이 글을 읽은 사람이 너무 먹는 애기 뿐이라 화가 나면 어쩌나,,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 먹보라서 죄송합니다. )
여행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새삼스럽게 짚어보자면 일단 여행은 절대 한 가지 통일된 양식으로 기억되는 경험이 아니다. 강의 평가를 하듯 '피로도 몇 점, 유적지 몇 점' 이렇게 정량적으로, 객관적으로 여행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행은 그 순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만들어내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어떤 여행은 모든 것이 완벽함에도 별로 즐겁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여행은 가서 내내 엉엉 울고 짜증만 냈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좋았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이처럼 여행의 기억은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복잡하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짜도, 절대 본인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여행의 불확실성이야 말로 여행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 같다.
그리고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점이다.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정말 말도 안되게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게 되지 않는가. 중간에 펑펑 울기도 하고, 여러 고초를 겪었던 앨리스의 여행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앨리스는 당차게 '나의 기분은 내가 정해. 오늘은 행복으로 할래'라고 말해버린다. 그리고 여행의 마음가짐에 있어서만은 나도 앨리스와 같은 입장이다.
모든 일은 결국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그런 면에서 산마리노 여행은 나에게 늘 기분 좋은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특별히 컨디션이 좋은 것도, 산마리노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것도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날씨도 변덕스럽고, 비에 쫄딱 젖고 엄청 걸었던 피곤한,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여행이다. 그저 그 날, 나의 기분을 돋구어주었던 멋진 파스타 두 접시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분 좋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너무 단순한 사람이어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 산마리노의 단순한 기억들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