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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ymundus Jun 20. 2021

환대의 문턱을 낮추는 방법

난민소설 『난민87』을 읽고

(난민 관련 책모임에서 2021년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작성한 북리뷰입니다.)




『난민87』은 14살의 소년 ‘시프’가 난민이 되어 지중해를 건너는 보트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소설이다.


주인공 ‘시프’와 친구 ‘비니’는 옆집에 사는 절친한 친구로, 수학 문제를 풀고 체스 두기를 좋아하며, 각각 엔지니어와 의사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소년이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비니’는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기 시작하고, ‘시프’는 죽은 줄 알았던 아빠가 아직 살아있으며, 정부기관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후 소식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전해 듣는다. 그러곤 군사학교 차출과 강제노역 동원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두 소년 모두 다른 나라로 떠나기로 결정한 날, 군인들이 새벽같이 집 안에 들이닥치더니 이들을 납치하여 사막의 수용소 감옥에 감금한다. 소설의 많은 부분은 두 소년의 수용소 생활과 탈출, 그 이후 난민이 되어 피난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책모임에서 다룬 대부분의 책들과는 달리, 『난민87』은 소설 형식인 점이 특징적이다. 소설의 각 챕터가 주요 사건 별로 나뉘어 있어서 챕터 별로 내용을 이해하기가 수월하며, 각 챕터의 내용이 그리 길지 않아 짧은 호흡으로도 충분히 집중하여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두 번째 챕터부터 마지막 챕터까지는 주인공 소년 ‘시프’가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군사들에 의해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탈출하고, 국경을 넘어 지중해를 건너는 보트에 타기까지의 과정이 시간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다. ‘시프’의 시선을 따라 책장을 넘기다 보면, 평범한 소년이 난민이 되기까지 겪는 사건들을 차례로 짚어 알 수 있고, 그 여정 속에서 소년이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 공포, 긴박함, 슬픔과 같은 감정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이입하여 느낄 수 있다.


그간 접해온 난민에 관한 자료들은 언론보도, 논문, 사진, 난민 지원 단체에서 게재하는 소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소설을 통해 접한 난민의 이야기는 사뭇 결이 다르게 느껴졌다. 다른 매체에서 접한 자료들의 경우, 저 멀리 해외에서 일어나는 일이건 가까운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소식을 거리를 두고 전해 듣고 지켜보는 것과 같이 대개 관찰자로서의 느낌을 받았다면, 소설을 읽는 동안엔 내가 직접 난민 소년의 입장이 되어, 소년의 경험과 생각이 마치 내가 주체로서 직접 겪는 경험과 생각인 것 마냥 느껴졌다. 직접 당사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난민이 갖는 경험과 생각, 느낌들을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함으로써, 난민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조금은 넓힐 수 있었다.


지중해를 건너는 보트 (출처 : © UNHCR/Giuseppe Carotenuto)


소설 속의 시공간적 배경은 구체적으로 특정되어 있지 않다. 소설 속 인물들이 북쪽의 국경을 넘어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길 희망한다는 점에서 아프리카 대륙 어느 국가의 이야기일 것이라 추측할 순 있을 것이다. 다만,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은 역모자라는 오명 속에 수용소에 무기한 구금되고, 군의 정보원이 도처에 있어 그의 가족들을 감시하고 검속하며, 해외로 피난하지 않으면 군사학교로 차출되거나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등 박해를 당하는 일이 일상과 같은 시간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관계없이 소설과 동일한 시공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난민의 주요 발생국인 시리아, 베네수엘라, 아프가니스탄 등의 국가들도, 1948년 즈음의 여수, 순천, 제주와, 1980년의 광주, 1980년대 민주화 이전의 한국도, 2021년 현재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여 민주화를 염원하는 미얀마도 마찬가지로 소설 속 시공간의 연속선상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 ‘시프’의 이야기가 단지 지구 상 저 먼 곳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이 아니며, 언제나 어디에서나 ‘지금, 여기’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과 여정이 지구 상 난민의 삶과 여정의 전형이라 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난민마다 출신국을 떠난 사유, 이동 중에 겪는 경험 등이 저마다 다를 것이며, 따라서 소년 ‘시프’가 겪는 몇몇 경험과 사건들은 실제 난민의 사연과 중첩될지도, 전혀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의 몇몇 에피소드와 주인공의 입장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난민의 상황을 충분히 알고 이해했다고 하긴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내의 난민들을 떠올릴 때, 저마다 출신국을 떠나온 이유는 무엇이며, 출신국을 떠나 겪었던 경험들은 어떠했으며, 난민캠프에 혹은 난민 지위 신청국에 도착해서 느낀 감정과 생각은 어떠했을지를 상상해본다면, 소설 속 ‘시프’의 시점에서 체험한 간접 경험은 우리의 이해와 공감의 폭을 조금은 확장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 혹독하고 험한 과정을 거쳐 우리 곁으로 온 난민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냉대와 은 환대의 문턱을 돌이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의 시점을 취하여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 최선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난민이 우리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님을 상기하는 데에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런 자각들이 ‘우리’ 안에서 공유될 수 있다면, 난민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환대의 문턱도 조금은 낮아지진 않을지, 2018년 예멘 난민의 입국 당시 만연하던 냉대와 혐오에서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발견하게 되진 않을지 생각한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겠지만, 소설을 통해 확장된 이해와 공감의 폭은 난민에 대한 환대와 연대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6월 20일 세게 난민의 날을 맞아, 모쪼록 많은 분들이 『난민87』을 통해 조금이나마 난민을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러한 개인의 경험들이 모여 보다 큰 환대와 연대로 이어질 수 있길 희망한다.


『난민87』 표지 / 아프리카 난민들의 주요 탈출 경로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서울: 한겨레출판, 2018)에서 장애인을 객체로 보는 ‘우리’의 무능력함을 이야기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말의 한계에 대해 “‘우리’(이 말의 폭력성을 용서해주길)” 이란 주석을 덧붙인 바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 또한 보다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한 저의 부족함으로 인한 것임을 외람되게나마 여기에 적어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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