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전교생이 60명 채 되지 않은 학교였다. 깡시골에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타고 ‘학담 1리’라는 글씨가 쓰인 정류장 앞에서 내려야 했다. 그 앞에 육교를 건너 굽이굽이 시골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ㄱ과 ㄴ을 합친 듯 단순하게 만들어진 교표가 보였다. 교문 너머 보이는 가파른 오르막길에는 전나무가 즐비했고, 그 옆은 온통 밭이었다. 날이 풀리면 열린 교실 창문 틈 사이로 소똥 냄새가 새어 들어와 우리가 있는 곳을 가득 채우곤 했다.
“주말에 만산수 갈 사람!”
여름이 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만산수에 갔다. 학교에서 조금만 걷다 보면 나오는 계곡이었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한 손에는 튜브를, 다른 한 손에는 라면 한 봉지를 들고 쫄래쫄래 무리를 지어 놀러 가곤 했다. 고가도로 밑 그늘진 곳에 터를 잡고서는 하나둘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속에서 바위에 붙은 알갱이를 똑똑 떼어 그 안에 숨은 애벌레를 깨우기도 했고, 일명 생명줄이라고 불리던 절대 뽑히지 않은 줄과 줄다리기를 하기도 했다. 한참을 놀다 따뜻하게 데워진 바위로 나와 앉아 덜덜 떨고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누구네 엄마가 요깃거리를 건네주고 떠나기도 했다.
나는 그곳이 참 좋았다. 물에 동동 떠 누워 있다가 뜨거운 햇빛에 눈앞이 빨개지면 그저 눈을 질끈 감아버리면 되니 말이다. 다이빙을 준비하는 친구의 옷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으로 받치고 있는 멍청한 짓을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쫄딱 젖을 지경이니 누구 하나 못나 보이지도, 누구 하나 잘나 보이지도 않았다. 이따금 좋아하는 오빠와 함께 놀 때면, 괜히 깊은 곳에 발을 딛고는 오빠에게 구해 달라며 손을 뻗기도 했다. 그러면 오빠는 얜 정말 죽을 것 같아서 구해줘야 한다고 멋쩍은 소리를 내며 나를 안아주었다. 물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다 부딪히는 몸들, 나무에 튕겨져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들, 헤어질 때가 되면 마구 흔들리는 손들, 시간에 쫓길 필요 없는 그 순간들이 좋았다.
가을이면 쓰레받기로 낙엽을 퍼다가 낙엽 싸움을 했다. 분기마다 찾아오는 삼겹살 데이에는 선생님과 부모님이 구워주신 고기를 한 움큼씩 받아 들고 운동장을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그러다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흙에 슥슥 도시락 게임판을 그려 놓고는 한 발로 겅중겅중 뛰어다니기도 했다. 한 쌈 가득 입에 넣고 호탕하게 웃어대던 소녀는 흙에 뒹굴어도 툭툭 털면 그만이고, 게임에서 져도 다시 하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운동장 한편에서 배웠다. 화장실에서 라면을 끓이다가 혼이 나도, 돌아서며 웃음 짓는 선생님 아래에서 존중과 학생의 태도를 배웠다. 하교하다 뱀을 보아도 그 위에 꽃을 뿌리고 꽃뱀-이라며 웃어넘기면 된다는 사실을 개구쟁이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배웠다.
우리는 시골이라고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 이름 앞에 大 자를 붙여 ‘大 공근중학교’라고 부르곤 했다. 시골 학교에 다니며 시내 친구들은 생각하지 못할 근사한 경험을 했다. 지금의 나는 이때의 내가 주름이 조금 생기고 생각이 많아진 것뿐 아닐까. 뒹굴고, 넘어지고, 혼나도 괜찮다. 멍 때리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도 뭐 괜찮다. 여전히 햇볕은 뜨겁고, 손을 뻗으면 닿을 낭만이 곁에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