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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선 Feb 20. 2024

미소가 예쁘다니까 그런 걸로 알게요?

쪼르르. 꼴꼴꼴꼴.


비어있던 와인 잔이 또 가득 찼다. 나의 옆에 앉은 사람은 벌써 세 번째 코르크를 뽑아 들었다. 주변 편의점이 모두 닫은 시간, 성산일출봉 그 아래에서는 조용한 휴식을 위해 왔다는 사람들의 모순적인 파티가 펼쳐지고 있었다. 마감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그 술집은 깊은 밤이 되면 한 테이블에 모든 손님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열댓 명이 둘러앉아 짠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마주 앉은 사람과 거리를 좁히지 못한 사람들은 옆 사람과 기억나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사람들의 볼 따라 데시벨도 높아져만 갔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내 대각선에 앉은 사람은 막차 시간을 살피더니 가봐야 한다며 일어났다. 대화 몇 마디도 나눠보지 못한 그녀와의 작별이 못내 아쉬워, 계산하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도 그런 나를 보았는지 나가다 말고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나의 귀에 속삭였다.


"언니, 웃을 때 너무 예뻐요."


그녀의 한마디에 자정을 달려가던 시계가 멈추었다. "네? 고마워요." 멋쩍은 웃음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이어 말했다. "들어올 때부터 웃을 때 예뻤어요. 가기 전에 꼭 말하고 싶었어요." 흔히 클럽 화장실에서 만취 상태로 나눌 법한 이야기를 만인의 앞에서 들으니 부끄러웠다. 소주를 한 병 거하게 걸치고 들어온 내가 그렇게 활짝 웃었나 싶어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요상한 분위기로 속삭이는 우리를 본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남자들과 맞장구치는 언니들 사이에 고개를 떨구고 배시시 웃고 말았다.


칭찬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차곡차곡 쌓인다. 그녀가 당긴 방아쇠에 그동안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웃는 걸 보고 단골인 줄 착각했다는 행원리 작은 카페 사장님의 멋쩍은 웃음소리가, 눈 오는 날 한라수목원에서 사진을 부탁드린 아주머니들께 되려 받은 감탄들이, 처음 간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짧은 인연들의 칭찬이 모조리 생각났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바람에 내 입은 주책스럽게 실룩였다. 웃는 게 예쁘다는 말, 제주에 와서 유독 많이 들었다. 다들 빡빡한 현실에서 벗어나 옅은 미소조차 예쁘게 보이는 건지, 정말로 내 미소가 예뻐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소가 어떻든 중요한 건 그런 미소를 띠는 내가 스스로 좋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원래 미소가 부자연스러웠다. 웃으면 넙데데해지는 얼굴이 신경 쓰여 턱을 한껏 아래로 당기고는 손으로 입까지 가리곤 했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화장기 없이 자유분방하게 퍼진 내 얼굴이 자랑스러웠다. 어떤 날은 거센 바람에 고데기가 모두 풀려 더벅머리를 흩날리기도 했고, 어떤 날은 쪽 찐 머리를 한 채로 안경을 턱 걸쳐 다니기도 했다. 이미 꾸며지지 않은 모양새를 하고 있으니 굳이 더 못나 보일까 미소까지 가릴 필요는 없었다. 입으로 올라가려는 손을 꾹 참고 내릴 때마다 나는 내가 아닌 주변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래, 이 자유로움을 느끼려 제주에 왔지.‘라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단출하게 반복되는 하루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줬다. 오전에는 할 것들을 하고, 오후에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한다. 일어나 주스를 한 잔 마신 뒤에는 책상 앞에 앉는다. 다이어리도 쓰고, 책도 읽고, 잡지에 실을 글도 몇 개 작성한다. 12시가 되면 냉장고를 뒤적거려 해 먹을 만한 걸 찾고, 다 먹고 나서는 고무장갑을 끼다 마침내 흘러나오는 너바나 노래에 맞춰 궁둥이를 열심히 흔든다. 기름 튄 옷을 벗으며 샤워실에 들어갈 때면 이미 나는 커트 코베인에게 빙의되어 세기 최고의 락스타처럼 움직인다. 그렇게 얻은 오후에는 제주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올레길을 걷거나 색다른 곳을 가거나.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눈을 마주치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여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도 제주에 와서 깨달았다. 제주에서 생긴 한 가지 습관이 있는데, 바로 가게에 들어서기 전 잠깐 멈춰 심호흡하는 것이다. 한숨을 크게 뱉고 내게 일어난 감사한 일들을 떠올린다. 내가 이 순간 제주에 있고, 건강하게 이곳까지 걸어왔고, 오면서 따사로운 햇볕과 근사한 풍경을 마주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비로소 내게 진짜 미소가 생긴다. 그 미소를 가지고 가게 문을 활짝 연다. 그러면 상대는 무장 해제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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