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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선 Feb 20. 2024

제주도는 입도 심사에 가스요금 계산식을 추가하라.

가스비 489,520원

외박을 한 게 문제였을까. 현관문을 열자마자 노란 종이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가스비 고지서였다. 나풀거리는 종이를 주워 들고는 온기가 식은 집으로 들어왔다. 먼 길을 걸은 탓에 진이 빠진 나는 허물을 벗듯이 내게 얹어진 것들을 하나둘 벗어 내렸다. 그리고 다시 노란 종이를 집어 들고는 쓰인 숫자를 확인했다. 489,520원. 어? 눈에 들어온 숫자가 머리를 통과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는 외마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귀에 꽂힌 이어폰을 잡아 빼고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489,520원.


스테이플러에 찍힌 종이 두 장이 야속하게 달랑거렸다. 두 번째 장에는 지난달 요금이, 첫 번째 장에는 지난달에 내지 않은 요금에 이번 달 요금이 더해져 쓰여 있었다. 눈앞에 놓인 숫자를 보고서야 지난달 고지서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난감한 상황에 호흡이 가빠졌다.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듯한 기분이 느끼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빠가 대신 받았다. 따뜻한 잔소리로 말문을 여는 아빠에게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채 다급한 말을 전했다. "아빠, 나 큰일이 생겼어. 가스비가 50만 원이나 나왔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 " 아빠의 목소리가 단박에 바뀌었다. 아빠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게 차분히 말했다. "어이고... 어쩌다가? 일단 가스 회사에도 전화해 보고, 어떻게 된 건지 한 번 알아봐. 별일 아니야. 괜찮아. 아빠가 내줄게. " 나를 다독이는 아빠의 목소리 뒤로 엄마의 한숨 섞인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전화기를 빼앗아 들고 내게 물었다. "뭐가 어쨌다고? 다시 말해 봐. " 날카로운 엄마의 말소리를 듣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내가 많이 썼나 봐... " 아빠는 너무 그러지 말라며 엄마의 손에 있던 전화기를 다시 낚아챘다. 그러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대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눈에서는 굵직한 방울들이 떨어졌다. 자책하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단돈 50만 원 때문에 쿵 내려앉아 버린 심장이 속상했다. 애꿎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다 친구 지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홀로 두근대는 마음을 주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우는 내가 일하던 카페의 매니저였는데,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자조 섞인 문자를 본 그녀는 곧장 내게 전화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딱딱한 질문들을 뱉었고, 별안간 탐정이 된 우리는 대화 끝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내가 쓰고 있는 세화가스가 도시가스가 아닌 LPG 가스일 수 있다는 정황이었다. 우리의 의심이 맞다면, 전 세입자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집을 양도한 것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내가 많이 썼다고 생각할 때가 속은 편했다. 지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메모장을 켜 해야 할 것들을 체크리스트로 정리했다. 토독토독 소리에 맞춰 채워지는 화면을 응시하다 그만, 전원 버튼을 잘못 눌렀다. 검은색으로 바뀐 화면 속 한껏 찌푸려진 내 모습이 보였다. 내천 자가 새겨진 미간을 두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폈다. 너무 예민해졌나 보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무엇도 할 수 없던 토요일 밤, 차디찬 바닥은 식어만 갔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이틀을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다 월요일을 맞이했다. 평일이 되기 무섭게 미루던 일들을 처리했다. 메모장에 체크 표시가 많아질수록 주말 내내 나를 괴롭힌 생각이 맞다는 증거는 하나씩 늘어만 갔다. 나는 전 세입자의 채팅방을 들락거리다 회피하듯 인스타그램을 켰다. 빠르게 바뀌는 영상 속 귀퉁이에 적힌 숫자가 올라가는 걸 무신경하게 지켜봤다. 시간은 어느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울리는 핸드폰이 적막을 깼다. 아빠였다. 늘 하는 안부 인사를 마치고, 주말 동안 내가 조사한 내용을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내 얘기를 듣더니 아빠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렇지만 큰일은 아니니 다음부터 유의하면 된다고 말했다. 아빠의 한마디에 축 처진 내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어깨를 폈다. 온갖 파도가 치던 머릿속은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바다가 되고, 먹구름이 잔뜩 낀 듯 어둑어둑했던 방 안도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빛이 들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는 또 굵방한 방울들을 눈에서 떨구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체한 손을 따 핏방울을 빼내면 모든 게 소화가 되듯 나 또한 그런 기분이었으니까.


나는 전 세입자에게 정중하고도 단호한 말들을 보냈다. 계약 조건이 다르다는 점과 이로 인해 대단히 속상한 일을 겪었다는 점을 말했다. 그리고 이에 따른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당근마켓을 통해 제대로 된 계약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뿐더러 그녀는 남은 임대 기간을 내게 넘기고는 보증금을 챙겨 떠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게 돈을 건넬 일은 만무했다. 게다가 양도 후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가스비를 돌보지 않은 내 책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부주의 혹은 거짓말로 인해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하고 사과하길 바랐다. 그녀는 곧장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가스비의 절반을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답했다.


사이다 같은 결말은 아니지만, 소화제 같은 결말이었다. 이 이상의 감정 소모를 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내 주변에 빛과 같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으로 족했다. 나의 세상을 밝게 비춰주는 그들 곁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것인지, 그리고 누군가 나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나는 어떻게 빛이 되어줄 것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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