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녀와의 첫 만남. 그녀를 인지하기까지의 시간
‘비가 오면 어쩌지.’
일주일 전부터 비 걱정에 애꿎은 일기예보만 들락거리는 그녀의 말이었다. 이제는 존재가 익숙한 그녀의 한마디에 새삼스레 그날이 떠올랐다. 그에게 헤어짐을 고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홍성행 기차에 오른 날이었다. 역에서 내려 만 원이 조금 넘는 택시비를 기사님께 건네니 어느새 여전히 여름밤공기가 가득한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8월의 여러 밤을 함께 보냈던 반가운 얼굴들과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섞여 있었다. 반가운 이에게는 두 달 만에 본 것이 무색하게 건조한 인사를 건네고, 낯선 이에겐 눈길을 주지 못한 채 고개만 까딱였다. 그런 내 옆에 자꾸만 손그림자가 스치고 분홍색 줄무늬 스웨터가 아른거렸다. 가만 보고 있자면 중학생 남자애가 까부는 듯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같은 방을 썼기에 짧은 시간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쩌다 헤어졌는지, 이곳에는 어떻게 왔는지.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 그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얼마 뒤에 있을 페스티벌이었다. 그녀는 직접 준비한 마음 치유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었는데, 실패의 경험을 에너지로 바꿀 용사를 찾는 스토리였다. 연기를 전공한 그녀가 준비한 프로그램은 어딘가 달라 보였지만 내게 흥미롭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상상되지 않았다.
당일이 되자 그녀는 부스에 앉아 꽃무늬 책상보를 펼쳤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 쓱 보고는 다른 부스를 구경하러 나섰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문득 궁금했다. 다시 돌아와 보니 그녀의 맞은편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다. 작은 소녀였다. 용사의 자격을 갖췄는지 간단한 테스트를 거친 소녀는 굳은 의지를 보이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실패를 해본 적이 있어요?’ 그녀의 질문에 대신 대답할 기세로 엿듣던 나는 이내 실패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외면하듯 생각을 멈췄다. 소녀는 내 질문을 왜 가로채려 하냐는 눈빛을 내게 쏘며 당차게 대답했다.
‘나 진짜 많이 실패하는데? 오늘도 했어요.’
‘오늘 유치원에서 친구랑-’ 조잘거리던 소녀의 차례가 끝나자, 나는 할 말을 채 정리하지 못하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녀는 내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괜찮은 척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최근 연애에 실패했어요. 잘해보려고 노력했는데 결국 잘 안되더라고요.’ 내 앞에서 고개를 살짝 비틀고 끄덕이는 그녀를 보자니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종이를 내밀며 실패를 겪었을 때 기분을 자유롭게 표현하라고 했다. 나는 나와 전 남자친구, 사랑, 우리가 살던 집, 우리의 강아지 우주를 그렸다. 손은 용사처럼 빠르게 움직였지만, 몸은 한껏 기가 죽은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조금만 갖다 대도 금방 타니까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내 손에 향을 쥐여주었다. 나는 그림 속 실패들을 하나씩 태우기 시작했다. 얼굴을 그을리고, 집을 구멍 내고, 하트를 흔적없이 날려 보냈다. 종이엔 오직 나와 우주뿐이었다. 어쩐지 후련한 마음을, 어쩐지 터질 듯한 눈물을 마음 한구석에 감춘 채 그녀를 쳐다봤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 속에 희미하게 번진 미소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