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 서정윤, <사랑한다는 것으로>
우리 부모님은 어렸을 적부터 몸이 허약했던 나를 계속 옆에 두고 싶어 하셨다. 대학 진학 당시, 부모님은 나를 그 지역에 있는 교대에 보내려고 하셨고,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고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결국 부모님은 내 손을 들어주셨다. 아빠 말로는, 대학 등록금 내러 은행 문에 들어설 때까지도 어느 학교에 등록금을 낼지 고민하셨다고 한다. 차마 그러지도 못할 분이셨다.
하지만 혼자 서울생활을 한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의기양양하게 서울로 올라왔지만, 나는 부모님의 걱정보다도 더 나약한 존재였다. 아침에 깨워주는 사람이 없으니 일어나서 학교 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돈 쓸 일은 왜 이렇게 많은지, 부모님이랑 살 땐 마트에서 내가 먹고 싶은 걸 담으면 됐었는데, 혼자 사니 밥을 먹을 때마다 돈이 줄줄이 새어나갔다.
나름 용돈을 벌겠다고 아르바이트도 했다. 부모님이 한 달에 100만원 가량을 내게 보내주셨는데, 놀랍게도 그 백만원이 한 달 살기에는 약간 모자란 돈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월세가 50만원이었고, 휴대폰비, 교통비, 생활용품, 밥값 등등 돈 나갈 곳이 수두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세대출 받아서 전셋집을 구하고 이자를 내는게 나았을텐데, 그땐 그걸 몰랐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살기에는 모르는 게 수두룩한 사람이었다.
부모님은 돈은 더 보내줄테니 아르바이트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에 보태어 쓰는 게 기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용돈을 아주 안 받을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용돈을 벌어 쓰는 그런 독립적인 청년 흉내를 내고 싶었나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는 게 훨씬 도움이 될 일이었다.
취직 7년차, 결혼 3년차. 나는 이제 정말 독립을 했을까? 음.. 부모님은 여전히 잔소리가 많으시다. 취직한 뒤로는 사회생활에 대해서, 결혼한 뒤로는 가정과 시부모님을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에 대해서 등등. 그리고 나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면서도 종종 부모님의 의견을 묻는다. 사실 답을 정해놓고 부모님이 그저 나를 지지해주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새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 나 자신인 것 같다. 누가 나를 새장에 가둬 놓은 게 아니라, 겁이 많아 아직도 새장을 멀리 떠나지 못 하고 금방 돌아오는 자식. 그런 연약한 새가 안쓰러워 쫓아보내지도 못 하고 새장 문을 열어두는 부모.
그래도 천천히 연습해야겠다. 언제까지고 그분들이 내 옆에 계실 수 없으니, 새장에 돌아오는 간격을 조금씩 늘려나가야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가 언제든 와서 쉬었다 갈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그 자유로움에 설레면서도, 왠지 가슴 한 켠이 시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