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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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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앙다 Dec 10. 2021

눈 감고 걷기

 누군가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 나이가 들수록 어려워지는 일이다. 어렸을 적만 해도, 우리 아빠, 엄마가 나에게 제일 좋은 것만 주실 거라고 무한 신뢰했었는데. 지금은 마냥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부모님의 결정보다 내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많아진 걸 보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을 믿지 못할 때도 있다. 사실, 나는 자주 남편을 믿지 못 한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 싱크대로 갔는데 설거지 하지 않은 컵이 있다. 그럼 나는 남편을 부른다. "이거 왜 안 씻어놨어?" 그럼 남편은 부엌으로 오며 대답한다. "뭘 말이야?" 그럼 나는 약간 신경질나는 말투로 받아친다. "이 컵 말이야. 먹으면 바로 씻어 놓기로 했잖아." 그럼 남편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거 내가 먹은 거 아닌데..." 그럼 나는 조금 아리송하긴 하지만, 이왕 말 꺼낸 거 그대로 밀고 나가본다. "나도 아닌데? 나 말고 먹을 사람은 여보 밖에 없는데? 그럼 여보가 그냥 놓은거지."


 그렇게 나는, 너무 쉽게, 나의 판단이 맞다고 믿어버린다. 어쩌면, 나는 그저 내가 늘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인 것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주변을 의심한다.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기가 어렵다. 인생이 약간 피곤하다. 때로는 바보처럼 믿어버리는 것도 괜찮은 일일텐데.


 남편과 산책을 하면서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걸어볼까? 위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결론이다. 눈을 감고, 남편을 무한 신뢰해서, 내 몸의 안전을 맡겨보자. 남편을 온전하게 믿어보겠다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여보, 나 눈 감고 걸을게. 나를 안전하게 인도해줘." 남편은 아무런 의심없이 대답한다. "응, 그래."


 눈을 감고 도로 옆을 걷고 있자니 자동차들 소리가 더 위협적으로 들린다. 이 도보 위에는 따릉이 자전거 거치대도 있고, 특이하게 도보 중간에 가로수들이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종종 누군가를 마주칠 수 있는 구간이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눈이 뜨고 싶었다. 무서웠다. 남편의 팔을 더 꽉 붙잡았다. "나 안전한 거 맞지?" 남편은 덤덤하게 대답한다. "응, 절대로 안전해."


 그렇게 몇 미터쯤 갔을까. 강아지 짖는 소리에 놀라 무의식적으로 눈을 뜨고 말았다. "으앗! 횡단보도까지 눈 안 뜨려고 했는데~!" 그래도 꽤 많이 걸어왔다. 200미터쯤 걸은 것 같다. 사실 시간으로 따지니 3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은 나는 안전하게 걸었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는 가슴이 콩닥콩닥하고, 괜히 발걸음이 꼬이고,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안전하게 걸었다. 나를 안전하게 인도해주는 남편을 믿고 좀 더 가볍게, 활기차게 걸어도 좋을 뻔 했다.


 삶이 그런 것 같다. 어차피 미래는 알지 못하고, 어차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 걱정보다는 기대를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지금까지 잘 살아 온 것처럼, 앞으로도 잘 살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내 옆에 있어준 사람들이 앞으로도 여전히 내 옆에 있어줄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좀 더 가볍게, 활기차게 살아가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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