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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소년 Mar 29. 2024

건국전쟁에서 말하지 않는 또 다른 이야기3

국민보도연맹 사건에서 건국의 아버지란 사람이 벌인 일들


건국전쟁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사건 3번째 이야기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전쟁 발발부터 시작해서 전쟁기간 전체동안 오랫동안 이뤄진 사건으로 이승만의 민간인 학살 중 정말 최악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건국전쟁이란 영화는 이승만의 과는 일체 숨기고, 공만을 부각시킨 대표적인 다큐멘터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 국민보도연맹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창설 배경


1948년 여순사건이 진압된 이후에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약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하였다. 동시에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약3만여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수감 가능 인원이 15,000명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상황도 있었다. 이 것은 일제시대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그대로 표방한 것이었고, 좌익인사들을 전향교화시키고자 만든 단체였다. 







보도연맹증(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1.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1. 우리는 망국적 북한괴뢰 정권을 절대 반대하자.
1. 우리는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하자.
1. 우리는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정책을 분쇄하자.
1. 우리는 민족진영의 각 정당 사회단체와 보조를 일치하여 대한 기상을 발휘하자.


출처 : 뉴스프리존(https://www.newsfreezone.co.kr)






2. 전개

하지만 이 것이 운영되는데 지방할당제 방식이 운영되었다. 그래서 좌익 인사 뿐만 아니라, 식량과 비료를 줌으로서 가입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아래는 그 증언이다. 


김수환(65): 아무 관계 없는 사람도 보도연맹 가입하라고 강연도 했어요. 국민학교 4학년, 5학년 때...

채의진(83): 당시에 시군으로 인원 배당을 했어요.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부역 안 한 사람도 가입하면은 쌀 준다, 비료 준다... 가난한 사람은 그거 타기 위해서 전혀 (대상이) 아니면서도 한 거예요.

                                       위키백과 보도연맹원 가입에 대한 증언





이런 상황에서 창립 1주년만에 약 30만명이 가입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문화계 사람들이 포함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삼대'를 지은 염상섭, 시인 정지용, 그리고 소설 '소나기'의 황순원도 보도연맹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황순원작가(출처: 위키백과)



그런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일찌감치 피난을 내려온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 행위에 협조하거나 의용군으로 입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학살현장(출처: 위키백과)




이에 분개한 이승만은 자신의 오른팔인 CIC 특무헌병대장 김창룡에게 명령하여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학살은 주로 헌병, 방첩대에 의해서 주도되었고, 이후 2개월동안 약 10만에서 15만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학살된다. 



보도연맹사건을 지시한 이승만



이 과정에서 남로당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상당수 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친일 지주들이 자신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그 지역 내에 명망있는 사람들을 무고하게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후 죽인 사례도 다수 있다. 아래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남 김해는 일제 시기부터 농민조합운동과 야학운동이 활발한 곳으로 유명했다. 김해의 김정태·강성갑 등은 일제하에서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에 진력해온 인물이었는데 지역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강성갑은 진영 한얼학교 설립자로 사재를 털어 교육운동에 헌신했으며, 김정태는 1919년 3·1운동 당시 진영 만세 의거를 주도해 대구 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독립군에게 자금도 제공했다. 그런데 해방 뒤 지역의 일제 끄나풀들은 이들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특히 강성갑에 대해서는 “진영이 고향도 아니면서 진영에 머물러 교육사업입네 하는 것이 아니꼽다”라고 험담했다 한다. 김정태를 향해서도 해방 뒤 그가 3·1절 행사 때 이승만 정부의 행사가 아닌 김구의 행사에 참가하자, 일제 시기 교사를 하다 여학생 추행 사건으로 면직된 경력이 있는 강백수는 그를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결국 김정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되고 말았다. 당시 진영읍의 우익계 비상시국대책위원회 구성원인 이석흠·이병희·김윤석·강백수 등이 ‘사설군법회의’라는 단체까지 조직해 학살을 기획·집행했다고 한다. 이석흠·김윤석·강백수 세 명은 1950년 7월 27일 지서 주임 김병희, 청방단장 하계백과 밀회해 강성갑의 살해를 모의했으며 곧바로 낙동강변에서 카빈 소총으로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잔혹사>, 김동춘 지음




한편 진영여자중학교 교사였던 김영명은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신혼이었고 미모나 인간성으로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으나, 지서 주임 김병희가 오빠 김영봉의 은신처를 캐묻다가 그녀를 성폭행하고 고문 치사한 뒤 암매장했다. 김영봉, 김영명의 부친 김성윤은 일제 때부터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지역 내 후진을 해외 유학까지 보낸 인물이었으나 진영 읍내 각 기관의 ‘유지’들은 이를 시기해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이들을 몰살시키기로 작정했다 한다. - <대한민국 잔혹사>, 김동춘 지음 - 밀리의 서재 






학살 현장(출처: 나무위키)




친일적 성향의 지주 유지들은 이를 자신들의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잡았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 특히, 한국독립당 출신의 사람들이 무고하게 보도연맹에 가입한 후 피해를 본 것도 사실이다. 



영화태극기 휘날리며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총살당하는 고 이은주 배우 [출처: 한국 천만관객 영화리뷰 태극기 휘날리며 출연진..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3. 결과 

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인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다 중공군이 개입됨으로서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자, 보도연맹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전쟁 이후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철저히 묵인되었다가 419혁명 이후, 장면정권에의해서 어느정도 진상규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은 이 유족들에 대해서 연좌제에 입각하여 이 들을 감시, 탄압하였고 2000년대 이르러서야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게 되었다. 밑은 그 증언이다 


▲ 노치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남유족회장. /손유진 기자

출처 : 경남도민일보(https://www.idomin.com)



-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정부는 유족을 관리(?)했습니다. 피해자 가족으로 산다는 것, 서러운 세월이었겠습니다.
"제가 당시 연좌제라는 게 뭔지 몰랐다. 성인이 되고 사회활동을 하면서 연좌제를 알게 됐다. 예를 들어, 11살 많은 형님이 있는데 마산고를 나와서 사관학교 가려니까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있고. 아버지 때문에 복잡한 사연이 많습니다. 숙부도 형님이 죽고나니까 규명하려고 활동을 했다고요. 박정희 군사 쿠테타 이후 잡아가고 곤혹을 치르다보니 연좌제 피해가 형님, 사촌형님 등 다들 받았다. 직장에 들어가기 힘든, 공무원 시험 못 친다라는 단적인 예. 큰 형님은 사관학교 합격하고 면접에서 떨어지는 경우, 다 그런 게 아니겠느냐 정리가 된다. 숙부가 그렇게 된 것도 이유겠지만 아버지가 원인이다. 아버지도 결국 국가에서 딱지 붙여서 죽였으니. 촌에 가면 단위농협이 있습니다. 단위농협에 여성부장이라고 있고요. 또 이장 중에도 파출소나 경찰서, 이런 데서 심어놓은, 명예직 경찰관이 있는데 경찰에 정보를 전해주는 역할이다. 저도 촌에 있을 때 20대 후반 즈음 이야기 듣기로 "노치수 당신은 집안에 빨간줄이 있다"고 파출소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나보더라. 파출소장도 집에 가끔 오고, 감시와 감독이라고 하죠."

출처 : 경남도민일보(https://www.idomin.com)



창원지방법원에서 마산 보도연맹 재심 결과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다(출처 오마이뉴스)






4. 하고 싶은 말 



혹자는 그런 말을 한다. 전시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보도연맹원들이 전쟁이 발발하고 좌익과 협력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단지 이승만의 불안과, 자신의 정치적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인한 희생자들이었을 뿐이다. 



"1950년 3월 철도보도연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6.25 때 후퇴하는 가운데 철도 수송에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정부에 충성했었다. 6.25 사변이 돌발하자 25일에는 타공전시체제(打共戰時體制) 강화를 했고, 26일과 27일 양일은 특히 보련 의무실이 청량리 밖 문이과대학 교정터에 이동의무실을 가설하고 2백여 명의 피난민을 무료로 구호했던 것이다."


오제도, 『공산주의 ABC』, 삼훈출판사, 1984.- p131-


나무위키 


국민보도연맹을 제안한 오제도는 이후 국민보연맹 사건에 대해서 후회하고 사과애햐 한다고 주장하였다(출처: 나무위키)



"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


출처: 나무위키 



제대로된 진상을 파악하지도 않고 무지막지하게 민간인을 죽였던 그였고, 625전쟁은 오히려 전쟁 과정에서 참혹하게 죽은 군인보다 이승만 정권의 무능함이 빚은 국민방위군 사건, 그리고 국민보도연맹등으로 인해서도 정말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 



1987년 현행법이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서 연좌제가 폐지되기까지 또 보도연맹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두 번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아픔이 체 사리지기도 전에 이제 학살자를 추앙하는 영화가 나오고, 서울 한 복판에 그가 민간인들을 학살한 현장에 기념관이 국민 혈세로 세워진다고 한다. 

‘이승만기념관’이 이승만의 과오를 기록할 수 있을까 (newstapa.org)



그렇다면 이러한 행위들은 어떤 가치가 야기될지 생각해봐라. 


'앞으로 권력을 잡기 위해서 죄없는 민간인들을 반공이라는 이념하에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는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른 서북청년당등의 불법적 단체들이 다시 한 번 난동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고, 이 들의 활동으로 


얼마든지 인권을 짓밟아도 괜찮다는 가치관이 만들어 질 것이다.  진보적 생각을 갖든, 보수적 생각을 갖든 그 것을 대화와 토론의 장에서 이야기 되어야할 대상이지, 저주와 학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 것은 전체주의의 발로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나치즘과 파시즘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소련 전체주의, 일본 군국주의의 끝은... 어떻게 결론이 나게 되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4차 산업혁명과 지식기반사회라는 우리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소외라는 또 다른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홍익인간의 이념이 제기되고 있는 과정에서 이승만이라는 독재자이자 학살자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는 이 영화는.........






과연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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