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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별, 김시민》

신화가 된 김시민

by 감성소년

1부 – 두 소년의 시작



충청도 목천현 갈전면 백전촌.
아침 안개가 들판 위를 부드럽게 깔고 있었다. 볕은 아직 산 너머에 걸려 있었고, 닭 울음이 고요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뒷산에서는 뻐꾸기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논두렁의 이슬은 아직 풀잎 끝에 매달려 있었고, 부엌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가볍게 피어올랐다.

열세 살의 김시민은 활을 메고 마을 어귀로 걸어가고 있었다. 손에 쥔 화살은 세 개뿐이었지만, 눈빛은 마치 백 개를 가진 사람처럼 자신감으로 빛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활솜씨는 마을에서 유명했다. 세 살 위의 형들이나 동네 사내아이들도 감히 그와 겨루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명.
그를 향해 늘 날을 세우는 또래가 있었으니, 바로 이개였다.

이개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부친은 현감과 인척 관계가 있었고, 그 덕에 마을 사람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말끔한 도포를 입고 나오는 그의 모습은 또래들 속에서 눈에 띄었으나, 눈빛에는 언제나 얄미운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날은 마을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전쟁놀이’ 날이었다.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창을 삼고, 버려진 가마니를 방패로 만들어 진영을 나누었다. 이개는 공격조, 김시민은 방어조의 우두머리였다. 공격조는 수가 많고 장비도 좋았다. 이개는 부잣집답게 아이들에게 말린 고기와 떡을 나눠주며 전의를 끌어올렸다. 반면 김시민의 방어조는 몽둥이와 돌멩이가 전부였고, 점심거리는 각자 집에서 싸온 보리주먹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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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개의 공격은 매섭게 시작됐다.
방어조 진영에 돌과 나뭇창이 쏟아졌다. 성문 역할을 하는 돌담이 흔들리자 어린아이 몇 명이 겁에 질려 달아나려 했다. 그때 김시민이 앞으로 나섰다.
“내 뒤에 있어! 나가면 맞는다!”
그는 돌담 위로 올라가 몸을 드러냈다. 공격조의 돌이 연이어 날아왔고, 한 개는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전날 밤새 깎아둔 조약돌이 들어 있었다.
“지금이다!”
그의 손에서 날아간 돌들이 정확히 공격조의 선두를 맞췄다. 연달아 세 명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 틈을 타 방어조 아이들이 돌을 퍼부었다. 기세가 꺾인 이개의 군은 결국 후퇴했다.

숨을 헐떡이며 돌담 아래로 내려온 시민의 손에는 아직도 피가 배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달아나려던 아이들이 그를 둘러싸고 말했다.
“시민아, 너 아니었으면 우린 다 잡혔을 거야.”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함께 지키는 거지, 내가 잘난 게 아니다.”

그날 저녁, 이개의 눈빛은 한층 싸늘해졌다.
“오늘은 네가 이겼지만, 다음엔 안 봐준다.”
시민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언제든 오라’는 생각뿐이었다.

며칠 뒤, 마을에 기이한 소문이 돌았다.
“큰 뱀이 소를 물어 죽였다더라!”
사람들이 들판 쪽으로 몰려갔다. 김시민도 활을 메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길가의 도랑 옆에서, 길이 두 아름이나 되는 청흑색의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 앞에는 거품을 물고 쓰러진 송아지가 있었다. 사람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누가 저놈을 잡겠나?” 어른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그때 시민이 활을 들었다.

“내가 하겠소.”
“안 된다, 시민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하지만 시민은 이미 화살을 시위에 올리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 뱀의 머리가 들리는 순간 화살을 놓았다.
슉—!
화살은 뱀의 한쪽 눈을 정확히 꿰뚫었다. 뱀은 비명을 지르듯 몸을 비틀었지만, 시민은 주저하지 않고 두 번째 화살을 날렸다. 목덜미 깊숙이 박힌 화살에, 뱀의 거대한 몸이 허물어졌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저것 보게, 김 공의 아들이 장부구나!”
“장차 나라가 필요로 할 장수로세!”

그 환호 속에서, 이개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활 잘 쏜다고 장수 되는 건 아니야.”
그의 말은 작았지만, 분명 시민의 귀에 들렸다.

몇 해 뒤, 두 소년은 각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시민은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지만, 무예와 기개로 이름을 얻었다. 마을 장정들이 모이면 그는 늘 선두에 섰다.
이개는 부친의 인맥과 재력을 등에 업고, 일찍부터 관아 일을 드나들었다. 서책보다 사람의 약점을 찾는 데 더 능했다.

장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느 날, 이개가 말을 걸었다.
“김시민, 언젠가 큰 전쟁이 나면… 네가 날 따르게 될 거다.”
시민은 피식 웃었다.
“그건 전쟁터에서 가려지겠지. 이개, 나는 싸움으로 사람 위에 서는 법만 믿는다.”

이개는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미소를 남겼다. 그 미소는 앞으로 수십 년 뒤, 두 사람의 운명을 전쟁터에서 엮어 놓을 예고와도 같았다.



2부 – 쇠붙이와 피비린내


1578년, 스물다섯의 김시민은 마침내 무과에 급제했다.
활과 창, 칼을 붙들고 보낸 세월이었다. 그동안 흘린 땀과 흙먼지가, 시험장에서 붓으로 이름을 쓰는 순간 눈앞을 스쳤다.
이제 나라를 지킬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첫 부임지는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였다. 나라의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관리하는 요직. 부임길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설레었다. 아마도 이곳은 칼끝이 번쩍이고, 군기(軍紀)가 바람처럼 서 있을 터.

그러나 그 믿음은 첫날, 한낱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병영의 창고 문을 열자, 먼지가 폭죽처럼 터졌다. 장창은 칼끝이 무뎌져 있었고, 갑옷의 가죽끈은 삭아 손만 대도 풀렸다. 화승총은 녹이 슬어 격발이 불가능했고, 화약고에는 눅눅한 곰팡내가 가득했다.

훈련장은 더 참혹했다. 병사들은 창을 세워두고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잤고, 보초병은 도박판에 앉아 있었다. 한 병졸이 황급히 몸을 일으켜 창을 쥐었지만, 그 창날에는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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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은 부하 장교에게 물었다.
“이 상태로 적이 들이닥치면 막아낼 수 있겠나?”
그는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며칠 동안 병영을 돌며 살펴본 결론은 하나였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무너진다.

그는 곧장 병조판서를 찾아갔다.
“대감, 소관이 훈련원에서 몸담아 보니 군기는 녹슬고 군인의 기강은 해이합니다. 변란이 일어나면 속수무책입니다. 병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해야 합니다.”

병조판서의 얼굴이 굳었다.
“태평성대에 무슨 훈련이냐? 괜히 백성을 불안하게 할 셈이냐?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김시민은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를 낮추어 간곡히 말했다.
“대감, 지금 웃고 있는 병졸들이 칼을 들 날이 옵니다. 그날이 오면, 웃음 대신 피를 흘릴 것입니다.”

그러나 병조판서는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손을 내저으며 말을 잘랐다.
“그만 돌아가 보게.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 그대에게도 이롭네.”

그 순간, 김시민의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에 쓰고 있던 군모를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장부가 이 모자를 쓰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지킬 뜻이 없는 자들과 함께라면, 차라리 벗겠습니다.”

사직서를 던지고 훌훌히 돌아섰다. 그날 이후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수년간 불우한 세월을 보냈다. 밭을 갈며 칼날 대신 쟁기를 잡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전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1583년, 북방의 회령에서 여진족 두목 니탕개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은 도순찰사 정언신에게 진압을 명했고, 김시민에게 부장직이 내려왔다. 몇 년 만에 다시 쥔 창의 무게가 손에 익었다.

2월, 회령 근처의 평야. 차디찬 북풍이 눈발을 몰아쳤다. 언 땅 위로 여진 기병대가 먹구름처럼 밀려왔다.
정언신이 외쳤다.
“김 부장, 좌익을 맡아라! 놈들이 측면을 파고든다!”

김시민은 말머리를 돌려 부하들을 이끌었다. 눈보라 속에서 깃발이 펄럭이고, 말발굽이 언 땅을 찢었다. 여진족의 화살이 날아와 부하 하나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김시민은 주저하지 않았다.
“형세를 세워라! 창을 내밀어라!”

그의 창끝이 선두의 여진 기병 가슴을 꿰뚫었다. 말이 고꾸라지고, 그 뒤의 기병들이 우르르 밀려 넘어졌다. 부하들이 함성을 질렀다.

세 차례의 돌격 끝에, 여진군은 패주했다. 김시민의 갑옷에는 화살깃이 여러 개 박혀 있었고, 어깨에는 얕은 상처가 나 있었다. 정언신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잘 싸웠다. 자네 같은 장수가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김시민은 눈을 좁혔다. 승리의 기쁨보다, 전투 후 눈에 밟힌 것은 얼어붙은 병사들의 시체와 무기였다. 여전히 녹슬었고, 여전히 무뎠다.
무기는 날마다 닦아야 한다.
몇 년 전, 병조판서의 방에서 짓밟힌 군모와 함께, 그 결심이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3부 – 진주로 가는 길, 그리고 군기를 세우다


진주성에 부임한 첫날, 김시민은 성문 앞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이개였다. 예전 목천에서 함께 자란 소년이자, 늘 경쟁하던 그 친구.
이제는 옛날의 장난스러운 표정 대신, 얇게 웃는 입가와 차가운 눈빛이 그를 맞이했다.

“김 목사, 아니… 이제는 장군이라 불러야겠군.”
“오랜만이군, 이개.”
“진주 땅이… 쉬운 곳이 아니오. 나 같은 사람의 도움 없이는 오래 버티기 힘들 거요.”

그 말은 겉으로는 조언 같았지만, 속뜻은 뻔히 드러났다.
김시민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 성을 지키는 건 권세가 아니라 군심과 민심이오. 나는 그걸 믿는다.”

이개의 미소가 살짝 비틀렸다.
“그래… 그 믿음이 얼마나 가는지 보자고.”
그는 말머리를 돌려 천천히 성을 떠났다. 김시민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언제나처럼, 싸움은 전장에서 가려질 것이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곧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은 겉보기엔 당당했으나, 안쪽은 달랐다. 창끝에는 녹이 슬었고, 갑옷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망루 위 병사는 활을 옆에 두고 졸고 있었고, 성문 옆에서는 군졸들이 막걸리 잔을 돌리며 웃고 있었다.

‘이래서야… 하루도 못 버틴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전임 목사가 병환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성 안의 기강이 바닥까지 떨어진 것이었다.

“전 병사, 감영 마당으로 집합하라!”
호령이 성 안을 울렸다.

마당에 군졸들이 모이자, 김시민은 천천히 그들 사이를 걸었다.
한 병사가 땅에 앉아 무기를 손질하지 않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 놈을 포박하라.”
“예? 장군님, 저는—”
“입 다물어라. 네가 군기를 무너뜨리는 주범이다.”

두 명의 장졸이 병사의 팔을 붙잡고 묶었다.
“저 놈을 묶어 장을 쳐라.”
“네!”
“나으리! 제발… 윽! 아아악!” 채찍이 살을 가르는 소리에 군졸들이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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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의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내가 치라 한 것은 저 자의 살이 아니다. 너희들이 지난 세월 쌓아온 나태와 태만, 오만을 치는 것이다! 이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라. 다시는 이 꼴을 내가 보게 하지 마라!”

그날 이후, 군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며칠 뒤, 그는 군량고를 살폈다.
구석에 쌓인 쌀가마는 곰팡이가 피고, 일부는 벌레가 들끓고 있었다.
“모두 창고 앞으로 나와라. 이 쌀을 옮긴다.”
“장군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아니다. 나도 한다.”

그는 직접 어깨에 쌀가마를 멨다.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주변에서 일을 하던 백성들이 웅성거렸다.
“저기 봐! 장군님이시다!”
“이 성의 최고 지위에 있는 분이 저렇게 직접…”
“무슨 장군이 쌀가마를 메고 다니신대?”

김시민은 땀에 젖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군량은 군졸만의 것이 아니다. 이 성을 지키는 모든 이의 생명줄이다. 그러니 나도 옮겨야 한다.”

백성 중 한 노인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장군님, 우리 집 아들놈이 군에 있습니다. 장군님 같은 분이 지휘하신다니 이제 안심이 됩니다.”
“아드님뿐 아니라, 이 성의 모든 이를 지키겠다. 목숨을 걸고.”

그는 낮에는 병기고를 돌며 무기를 점검했고, 밤에는 장졸들과 함께 활과 화포를 다루는 훈련을 했다.
“활을 당길 때는 숨을 멈춰라. 그렇지, 방금처럼!”
“예, 장군님!”
장졸들의 눈빛 속에 전의가 서서히 살아났다.

어느 날, 무기를 닦던 병사가 물었다.
“장군님, 나라가 망하는 건 성이 무너져서입니까?”
“아니다. 마음이 먼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 말에 병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저희는 이제 절대 마음을 놓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산다.”

민심과 군심이 함께 살아나는 성.
진주성은 다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시민은 알았다.
‘이개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성 안을 흔들려 하겠지.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이 성을 철옹성으로 만들 것이다.’


4부 – 진주 대첩



오사카성 깊은 전각,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 보고서를 덮었다.
평양성 전투 패전, 한산도 해전의 참패, 의병 봉기의 확산…
“이래서는 안 된다. 명으로 향하는 길이 막힌다.”
그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났다.
“의병의 근거지를 쳐라.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
손이 지도를 짚었다. 남강을 낀 요새, 전라도로 가는 길목—진주성.
“전군을 동원해 함락하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전하라.”

사천의 승전, 그리고 이개의 패전

남강 물안개가 걷히는 새벽, 김시민은 사천 전선에 섰다. 곽재우, 함안·곤양 군수, 의병들이 함께였다.
“숨을 죽여라… 신호하면 일제히 돌격이다.”
매복한 병사들의 심장이 북소리처럼 뛰었다.
“지금이다!”
조선군이 폭발하듯 뛰쳐나왔다. 창끝이 번쩍이고, 왜군 진영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패주하는 왜군을 김시민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놈들을 남기지 마라!”
사천 전투는 완승이었다. 진주성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개가 독단으로 병력을 이끌고 출전했다.
“와키자카 따위, 내 손에 쓰러뜨리겠다.”
결과는 참담했다. 일본군 주력과 맞붙어 궤멸.
그는 모함을 날렸다.
“김시민이 지원을 게을리해 패했다.”
조정의 질책이 내려왔지만, 김시민은 대응할 시간조차 없었다.
왜군이 이미 진주성 앞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첫 공성


남강 건너편, 깃발 숲처럼 왜군 진영이 들어섰다. 사다리, 운제, 공성탑이 빽빽히 세워졌다.
성 안 장터마저 조용했다. 장정들은 돌을 나르고, 아낙들은 부상병 붕대를 찢어 만들고 있었다.
김시민은 성루 위에서 병사들에게 명했다.
“화차를 장전하라!”

100보… 80보…
“쏴라!”
굉음과 함께 화차의 화살이 불꽃을 그리며 날아갔다.
“끄아악!”
불붙은 화살이 왜군의 갑옷과 살을 꿰뚫고, 사다리를 들고 있던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비격진천뢰, 준비하라!”
쇳덩 속에 화약과 쇳조각을 가득 채운 무기가 날아갔다.
쾅!
폭발과 함께 수백 개의 쇳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눈과 목, 가슴에 박힌 조각에 왜군들이 쓰러졌다.
멀리서 와키자카가 이를 갈았다.
“저게… 비격진천뢰냐…”


병사의 시점


포연 속에서 창을 쥔 병사 이도현은 손이 떨렸다.
“무섭냐?” 옆의 전우가 물었다.
“…무섭지. 하지만, 저기 계신 장군님이 더 무서울 거다.”
김시민이 화살을 시위에 올리고 있었다. 왼팔에 피가 흐르는데도 표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도현의 두려움이 서서히 분노로 바뀌었다.


부민의 시점


성 안의 부녀자 박씨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돌을 나르고 있었다.
“아주머니, 왜 이런 위험한 일을…” 누군가 물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기 서 있는 분이 우리 장군님이오. 그분이 지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전투의 연속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적들은 멈추지 않았다.
시체를 밟고 성벽에 오르고, 조총 사격이 성루를 덮었다.
김시민은 칼과 활을 번갈아 쓰며 성벽을 누볐다.
왼팔은 베여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세, 네 놈을 베어냈다.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장군님처럼 싸워라!”
“가족을 생각하라!”
“와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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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도 전투는 끊기지 않았다. 대장간의 망치질, 군사들의 발걸음, 장전하는 소리…
화차와 비격진천뢰가 번갈아 불을 뿜으며 적들을 날려버렸다.


와키자카의 총공격


사흘째 밤, 일본군 본영에서 고성이 터졌다.
“도대체 며칠째란 말인가! 관백저하의 낯을 어떻게 뵐 것인가!”
와키자카가 느긋하게 말했다.
“조선군은 내일을 버티지 못할 것이오. 전군 총공격하라.”

마지막 날

새벽, 구름을 찢으며 왜군의 함성이 터졌다.
“물러서지 마라! 이 성은 조선의 심장이다!” 김시민의 고함이 울렸다.
비격진천뢰가 또다시 발사됐다.
쾅!
그러나 적들은 멈추지 않았다.
시체를 밟고,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기어올랐다.

“장군님! 좌측 방어선이 무너집니다!”
김시민이 달려갔다. 칼 한 번에 다섯 놈이 베어나갔다.
적들이 그를 피해 물러섰다.
“저 자를 먼저 죽여라!” 와키자카의 명령이 떨어졌다.
수십 정의 조총이 불을 뿜었다.


장군의 최후


탄환 하나가 김시민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지만, 칼을 놓지 않았다.
그 순간, 성 밖에서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
곽재우, 최경회 등 의병이 후방에서 왜군을 덮쳤다.
“젠장! 후퇴하라!”
와키자카의 명이 떨어지자 왜군이 흩어졌다.

성문이 열리고 의병이 들어왔을 때, 군민들이 울고 있었다.
“장군님이… 장군님이 쓰러지셨다!”
곽재우가 달려와 손을 잡았다.
“김 장군! 눈을 뜨시오!”
김시민의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마지막까지 지켜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고요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진주대첩 5부 – 신화가 된 김시민


진주성엔 드디어 고요가 찾아왔다. 아니, 고요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 찢어질 듯한 정적이었다. 흙과 피, 불과 연기가 뒤엉킨 그 아침. 해가 솟았건만, 성 안은 해를 보지 못한 듯 어두웠다.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고, 누군가는 성벽에 기대어 그저 울고만 있었다.

김시민 장군의 시신은 병사들에 의해 장대 앞으로 옮겨졌다. 갑옷은 칼자국과 화살 자국으로 너덜너덜했고, 그의 왼편 가슴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고통이 아닌 안도감에 가까웠다. 마치 마지막까지 백성을 지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한 미소였다.

곽재우와 함께 입성한 의병장들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장군... 장군만 아니었으면 이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진주성 남문을 향해 몰려든 이들이 있었다. 살아남은 백성들이었다. 옷은 찢기고, 발은 맨발, 어떤 이들은 아이를 안은 채 절뚝이며 걸어왔다. 누군가는 김시민 장군의 이름을 부르며 목이 쉬도록 외쳤다.

“장군어르신... 장군어르신… 어디 계십니까...”

그들은 하나둘 무너져 내렸다. 성문 앞에서, 장대 아래에서, 흙바닥 위에서. 발을 굴러 울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어떤 이는 망자의 갑옷 자락을 붙잡고 울부짖었고, 어떤 이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그저 가만히 울었다. 울음소리는 곧 노인의 울음과 젊은 엄마의 흐느낌, 아이의 칭얼거림이 뒤엉켜 하나의 거대한 곡(哭)이 되었다.

“장군이 우릴 살리셨소이다… 우리 목숨 값보다 귀하신 분이었소이다…”

곽재우는 이 모든 광경을 굳게 다문 입술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김시민의 시신 위에 자신의 칼을 놓았다.
“이 나라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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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진주성엔 북소리도, 명령도, 고함도 없었다. 오직 하나, 울음뿐이었다.

하지만 이 통곡은 단지 슬픔에 머무르지 않았다.
진주성 전투 이후, 조선의 하늘 아래를 흐르던 절망의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막아냈다.”

김시민은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살아남았다.
그의 우뢰와 같은 목소리는 여전히 병사들의 가슴에서 울려 퍼졌고, 그의 마지막 창끝은 조선의 용기와 불굴을 상징하게 되었다.

심지어 일본에서도 그는 전설이 되었다.
김시민은 ‘모쿠소(木霄)’라는 이름으로 그림과 이야기 속에 공포의 상징으로 남았고, 왜군들은 훗날까지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다. “진주성의 망령이 밤마다 목을 자를 것”이라는 속설까지 생겼다.

그리고 이 싸움은 단순한 전투 이상의 것이 되었다.
조선의 군민들은 이 진주대첩을 통해 깨달았다. 더 이상 일본군에 맞서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더 이상 조선군은 패배만 거듭하던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날, 진주에서 조선은 ‘희망’을 얻었다.

김시민은 이제 더 이상 한 명의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신화가 되었다.
조선을 지킨 의지의 표상이자, 그 어떤 칼보다 강한 정신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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