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중학교 때 종종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넘기곤 했다. 고등학교 소풍날 같은 머리 스타일로 사진을 찍었는데, 옆머리가 휑했다. 이후로 헤어밴드를 하지 않았다. 머리숱이 줄었던 이유는 아침에 등교하느라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집에서 경험하는 스트레스도 한 몫했을 것이다. 공부만이 내 살길이라고 여겨 공부에 과하게 몰두했던 것도 다른 이유였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이유였든 탈모가 시작되고 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곤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중학교 때 뒤통수에 흰머리가 많다고 친구들이 뽑아준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탈모까지 시작되었으니 머리가 신경 쓰여서 편하게 엎드리지 못했다. 엎드려 자는 친구를 보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뿐인가. 키 큰 친구나 교회 오빠가 내 휑한 정수리를 볼까 봐, 지하철 내 뒤에 선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까 싶어서 마음 졸이곤 했다. 탈모는 내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20대 중반쯤 병원에 갔지만, 치료하기 어렵다고 아이를 낳고 와서 적극적인 치료를 하자고 했다. 다른 병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동네 미용사가 백만 원대 프로그램에 등록하면, 머리숱이 늘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큰 마음먹고 등록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탈모샴푸나 탈모에 도움 되는 방법들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지인들은 내게 탈모에 도움 되는 방법을 소개해주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미 많은 노력을 하고 수차례 실패하면서 느낀 무력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탈모 때문에 나는 움츠러들었고, 탈모 이야기가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다.
내 마음은 어떻게 변했던 걸까? 30대 초반 병원 수련 시절, 집 근처 토성을 산책할 때였다. '나는 왜 이렇게 탈모가 수치스러울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사건을 떠올렸다. 탈모가 시작될 때, 엄마에게 말했던 것 같다. 엄마는 "머리숱이 줄어서 어쩌니?"라고 이야기하셨던 것 같다. 보통 가정이면 어땠을까? 딸이 탈모를 겪는다면, 엄마는 당장 피부과에 데려갈 거다. 하지만 우리 집은 탈모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폭력이 일어나는 가정은 생존이 일 순위다. 탈모 따위는 주요한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웠고, 엄마도 탈모를 겪고 있었다. 탈모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은, 탈모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던 우리 집과 부모, 그곳에 뿌리 둔 나에 대한 수치심에서 나왔다.
한참을 걷다가, 다시 문득 생각했다. 폭력을 당한 사람을 피해자라고 부르지 않고 생존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폭력을 일방적으로 당한 사람이 아닌, 폭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고자 노력하고 그 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바라보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머리카락들도 살아남은 것 아닌가. 소리 없이 주변머리들이 빠지던 중에도 자기 자리를 지켜준 것 아닌가. 얼마나 강인하고 대견하고 고마운가. 내 머리카락을 생존자로서 바라보기 시작하자, 휑한 정수리를 덜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나는 어둠이 가득하던 가을밤, 길을 따스히 밝히는 가로등 사이에서, 잃은 것과 남은 것을 생각했다.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잃은 것들이 분명 많다. 하지만 남은 것이 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그 무엇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