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결혼 직후부터 아이를 원했지만, 바람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난임부부로 몇 년 살면서, 종종 부모의 자격을 생각했다. '부모의 자격이 무얼까?' 아니다. 정확히는 '나에게 부모의 자격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에게도 그런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을까 봐 두렵다. 나 역시 그러했다. 20대에는 내 피가 무섭단 생각을 종종 했다. 광기 같은 폭력성이 내 안에서 어느 날 튀어나올까 봐, 분노를 억누르고 참곤 했다. 문제는 분노가 차곡차곡 쌓이다가, 폭발적으로 나올 때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돌아보면 참 많은 마음 작업을 했던 듯하다. 나와 부모를 객관적으로 보고, 내가 부모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분노의 긍정적이고 유용한 점을 배우고 실제로 분노 표현을 대인관계에서 실험하며 배웠다. 수년을 거쳐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임신을 원하며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린 시절 내가 경험한 것 때문에, 아이를 잘 기르지 못하면 어쩌나, 학대하면 어쩌나?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는, 내가 엄마 될 자격이 없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나 라는 불안이 따라왔다. 때마침 아동학대 사건도 연이어 터졌는데, 나는 그들을 비난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엄마가 되면, 잘할 수 있을까?
어느 뉴스 기사에서 이 고민을 풀 실마리를 떠올렸다. 산모가 출산 후 신생아를 버린 사건이었는데, 다행히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되었다. 뉴스를 보고 아기와 돌보는 사람을 새롭게 생각했다. 아기는 혼자 있으면 생존하지 못한다. 체온조절도 하지 못하고, 음식을 구해서 먹지도 못한다. 배설물을 스스로 치우지도 못한다. 아기는 돌봄 없이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모두는 돌봄 받고 사랑받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사랑받은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어도, 최소 한 번은 사랑받은 게 아닐까? 태어났을 때 탯줄을 자르고 젖은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혀 어르고 달래준 누군가에게 분명 사랑받지 않았을까? 상담실에서 부모와 자녀 간에 사랑이 엇갈리는 일을 자주 본다. 폭력과 학대 역시 상담실 단골 주제이다. 하지만 한 번도 사랑받지 않은 사람, 한 번도 돌봄 받지 않은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누구에게서든 사랑과 돌봄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나는 나와 모든 사람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받고 돌봄 받아,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다. 내가 만나는 내담자도 사랑과 돌봄 받지 못했다면,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 내담자가 호소하는 고통스러운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도 분명 사랑과 돌봄 받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내담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과 돌봄의 파편들을 내가 기억하리라 결심했다.
내가 사랑받았음을, 내가 돌봄 받았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와 타인을 사랑하고 돌볼 수 있다. 부모의 자격은 트라우마 유무, 원가족 문제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내가 받은 사랑과 돌봄을 얼마나 기억하느냐가 아닐까. 이 대목에서 씩 웃음이 났다. 나는 아직 부모가 아니었다. 하지만 부모 되는 일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