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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Aug 11. 2022

12 미래는 모르겠고 휴가는 가야겠다




대부분 앉아 있다. 그리고 가끔은 누워있다. 움직이는 건 손가락과 눈알뿐, 딱히 없다. 수강 신청 기간까지 손에 꼽을 정도의 날만 남겨두고 있는 이 기간은 절망하기에도 너무 늦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그런 시간이다. 얼마 남지 않은 방학. 놀기라도 해야지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는 기간이기도 하다.




속이 쓰리다. 걱정은 한 가득이고. 과연 마지막 학기에는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을지, 수강 신청 화면을 보며 고심한다. 해결되는 것은 없지만 걱정을 멈추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계속 걱정거리를 만들어내기만 한다. 벌써 정원을 넘어서 버린 숫자를 보고, 다른 수업의 후기를 찾아보면서 고민은 깊어진다. 졸업 전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아이디어도 떠올리지 못했으면서. 와중에 이런저런 급박한 휴가 일정들이 잡히면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못 이기는 척 휴가를 갈 생각이다. 그렇게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호텔 방의 침대에서도 잠 못 드는 밤은 이어지겠지만.


온전히 나의 결정으로 여행을 간 적은 없었다. 누군가의 제안이나 계획의 일부였던 적만 있었을 뿐이다. 이번의 짧은 여행도 그렇게 가게 되었다. 휴가를 가긴 가야 할 것 같다는 아빠의 결정, 그리고 호캉스라도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휩쓸렸다. 친구들과 즐겁게 놀고도 집에 오는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 같은 종류의 사람은, 혼자서 여행을 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을 '버리고' 나면 분명히 즐거웠음에도 불구하고 후회를 거듭하며 결국 책상 앞에 앉는다. 그나마 여행지에 가면 핸드폰 화면조차 거의 보지 않게 되어서 그런지 뭘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억지로라도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하면 걱정까지 포기하게 된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가끔은 그렇게 완전히 현실에서 나를 분리할 기회가 생긴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여행이 끝난 뒤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최대한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다음 데드라인까지 도망치는 것. 나에게 여행은 그렇다.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려 해도, 습관적 죄책감은 벗어날 수 없다. 이대로 영원히 떠나갈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대로 사라지는 대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차를, 자동차를 탄다. 이런 길을 왔던가 싶은 길이 점점 아는 길로 바뀔 때,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오는 것은 이토록 쉽구나. 가는 것을 그렇게 어려웠는데. 내 방 침대에 눕고 나면, 나는 여행의 기억을 잃고 집의 익숙함에 잠식된다. 어제 어디서 뭘 했더라? 사진도 제대로 찍지 않는 나의 머릿속에서 기억은 점점 사라진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을 기록한다. 음식 사진도 찍지 않는 나는 뭔가를 기억하고자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가지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사각형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아름다워지는 이미지를 수집한다. 건물의 구석. 바닥에 떨어진 물건. 길가의 잡초. 버려진 물건. 그런 것을 찍는 걸 좋아한다. 가령 아스팔트 위에 놓인 부서진 스티로폼을 찍는다고 하면, 사각형 프레임 안에 들어온 모습이 아름답도록 조정한다. 그건 더 이상 아스팔트도 스티로폼도 아니다. 검고 거친 면 위의 흰 모양일 뿐이다. 대상을 대상으로 보지 않고 색, 질감, 형태의 조합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름다운 풍경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 같다. 내 여행 사진은 그런, 일견 알아볼 수 없는 이미지가 전부이다.


여행은 삶의 공백이다. 매일 경험하는 불안과 죄책감마저 잠시 미뤄두고 어딘가로 떠나 다른 걸 먹고 다른 곳에서 살며 다른 식으로 행동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다른 사람인 척할 수 있다. 고민도 없고 행복한 사람인 척하는 시간이 지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나로 돌아간다. 벗어 놓은 피부를 다시 입는다. 나는 다시 내가 되고 여행지의 일을 잊는다. 문득 떠오르지도 않는다. 이번 달의 며칠이 사라져 버린 셈 치면서 언제든지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는다. 여행은 나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아야만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인 척할 수 있는 시간이어야 한다. 쉼으로 잃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곧 일상을 버리고 도망칠 작정이다. 일탈은 짧고 실망스러울 것이고 나는 한 발 여름의 끝으로 밀려나겠지. 지구는 멈추지 않고 자전과 공전을 이어가고 시간은 흐르고 우주는 팽창을 거듭하겠지. 나는 집으로 와 일탈의 순간을 잊고 익숙한 세계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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