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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Aug 08. 2022

11 종일 누워있기 시작했다




방학 중간, 게으름의 시즌이 왔다. 침대에 종일 누워서 남들이 만든 이야기를 소비하며 시간을 보내버린다. 결말 이후에 남겨진 나는 현실의 지지부진함에 질리고 종래에는 의미불명의 공허함에 도달한다. 세상은 왜 이리 재미가 없는지, 인생에는 왜 아무런 드라마도 없는지. 치밀하게 짜인 이야기 속 사건과 감정의 동요에 올라타 있던 나는, 일순간 현실로 굴러 떨어진다. 다시 비현실의 세계와 맞닿아야만 살아있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게 다양한 감정을 느낄 일은 현실에 없으니까.




주제를 가진 이야기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환심을 쉽게 사는지도 모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인생과는 달리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의 목표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고 그들의 삶이 길게 이어져 하나의 의미로 귀결된다.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들은 가질 수 없는 것, 하지만 가지고 싶은 것이 이야기 속에는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감정에 편승해 이야기를 따라가던 인간은 그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그새 성장하고 사랑하고 행복해져 한 챕터를 끝맺었다. 그들은 이제는 완벽해 보이는 삶을 살아갈 예정이지만, 나는?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다.


그런 괴리가 오히려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특히 사랑 이야기. 로맨스 장르야말로 판타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이 분명한 한 시간짜리 로맨틱 코미디. 이 둘이 이어질 것은 확실하기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불안할 일이 없다. 응원할 필요도 마음 졸일 필요도 없다. 내 인생과 어떤 관련도 없는 남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끝나도 딱히 영향은 없다. ‘나름 좋은 시간을 보냈어.’ 정도의 감상, 혹은 그마저도 없을 때도 있다. 때로는 놀라고 싶지 않고 반전에 충격받고 싶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지 않을 때는 이미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행복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하나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어쩌면 손에 꼽을 만큼의 순간만큼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았을 때 행복했다고 믿을 뿐, 사실 원래 행복한 순간 따위는 없는 것이 아닐지 의심이 든다. 그래서 뻔한 해피엔딩이 좋을 때가 많다. 더 뻔한 내용일수록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완벽한 행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중간에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주인공은 만족감을 느끼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들은 행복한 순간에 완전히 박제된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흔한 동화의 엔딩처럼. 현실은 완벽한 순간에 멈춰 서지 않는다. 한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고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렇기에 삶의 단상에 불과한 이야기는 현실보다 편안하다.


굳이 불행하고 우울하며 지루한 이야기에 끌릴 때가 있다. 그때의 나는 선택하는 이야기만큼이나 우울한 상태이다. 도망칠 구석도 없고 행복한 이야기를 보며 반응하기도 지쳐있는 상태이다. 그러면 비로소 위시리스트에 있던 3시간짜리 예술 영화를 튼다. 현실 비판적인 내용이 가득한 단편 소설집을 편다. 착잡하고 가라앉고 답답해진다. 그런 이야기는 만족스러운 끝맺음도 없다. 서서히 떠나지만, 왜 떠났는지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엔딩을 맞이한다. 나는 이야기의 시작에도 끝에도 비슷하게 우울한 상태이다. 하지만 때로는 우울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울함에 집중하는 것을 선택할 때가 있다.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닌, 그냥 엔딩은 마냥 흐르기만 하는 현실과 가장 닮았는지도 모른다.


내게 의미가 있는 작품들은 다시 경험할 때 처음의 그때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때의 내가 어땠는지, 이 이야기에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심지어 지금 나의 기준으로 잘 만든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과거에 좋아했다는 사실 만으로 즐길 수도 있다.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고 싶은 건, 그때 행복했던 나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어쩌면 좋아했던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 보는 것은 그때 즐거웠던 나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 엔딩을 기점으로 우리는 이야기와 분리된다. 다시 돌아가도 처음과 같은 기분은 느낄 수 없다. 졸업 후 오랜만에 돌아간 학교처럼, 이사를 하고 다시 돌아온 고향처럼. 향수가 가득한 기억뿐, 처음의 그곳과는 달라져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소화한 결과, 나는 가짜들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 어떤 이야기를 좋아했는지로 내 삶의 시대를 구분한다. 그 나이에 어디서 뭘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거나 아예 없어도 어떤 이야기를 좋아했는지 따위는 잘 기억한다. 일상의 경험이 가공된 판타지로 대체된다. 과거의 기억도 만들어진 이야기로 덮인다. 나는 나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당연하게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시간보다 머릿속으로 뭔가를 하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는 현존하지 못하고 과거, 미래, 그리고 화면과 활자 너머의 세계 사이를 오간다. 가짜들의 행복을 열심히 빌어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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