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해는 짧아지고 나는 개강이라는 확정적 결말을 받아들였으며 지난 한 달 동안 한 장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 졸업 전시에 대한 아이디어도 없고 미래를 위한 계획도 없으며 당장 오늘도 침대에 누워 보냈다. 사실상 지금 가장 기다려지는 건, 개강 이주 차의 추석 연휴뿐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연휴를 기다린 적은 딱히 없다. 대학생이란 바쁜 와중에도 최대한 놀 시간을 찾아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을 뒤로 미루는 짓에 가깝다. 미루기의 예술을 거의 완벽으로 끌어올리는 시기가 이때가 아닐까 싶다. 지금처럼 미룰 수 있는 때도 없을 테니 말이다. 앞으로는 방학도 없고 사실상 주말도 없으며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에는 무거운 일들이 쌓일 예정이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미래를 쟁취했을 때 따라오는 것이다. 그마저도 하지 못한다면 글쎄. 영원히 누군가가 되기를 미뤄야만 할지도 모른다. 왜 학교로, 전공으로 나중에는 직업을 내 정체성의 전부로 여기는 걸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그 맥락 바깥의 나는 존재할 수 없는지.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사회를 얌전히 살아가는 데에 하등 쓸모없는 생각들 말이다.
생각하는 걸 좋아해서 미대에 갔다. 글보다 그림에 더 소질이 있었고 이미지는 무엇보다 매력적이기에 선택했다. 사실 미대란 온갖 생각을 표현하는 걸 배우는 곳이다. 그림은 아이디어가 100% 일수도 있고, 그림 자체가 100% 일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왜, 무엇을, 어떻게. 생각 없이 이미지를 만들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이어가는 연습을 해왔다. 이미지에 대한 고민. 세상에 대한 나의 시선. 내가 보는 것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으로 변환하는 방법. 원래도 생각하는 거로 시간을 보냈으니 어쩌면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지. 세상은 생각할 거리로 가득 차 있고, 동시에 이미지로 붙잡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계속 지치기만 하는 것은 왜일까. 현대인의 고질병인 만성 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시달리는 번아웃? 창작과 생산성에 대한 강박? 나는 내 생각을 자주 하지만 여전히 나를 잘 모른다. 전부 문제일 수도 있고 사실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 상쾌한 경험을 한 사람은 손에 꼽겠지. 살면서 한 번도 아침에 상쾌했던 적 없는 나처럼. 사실 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데 나의 평범하게 불행한 삶이 불만인 인간일 수도 있다. 다들 이 정도로 피곤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지루한 삶을 사는 건 아닌지. 그리고 동시에 그게 너무 오만한 생각은 아닌지 생각한다. 생각만 많이 한다. 어떤 결과로도 이어지지 않는 과정의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사는 건 그냥 계속 과정이기만 할 것 같다. 어떤 운명적 사건도, 기승전결도, 결말도 없이 말이다. 어릴 때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으면 나처럼 되는 모양이다. 글을 좋아하는 친구가 하는 불평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 속 주인공 같은 삶을 기대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떤 일. 어떤 일이든 일어나서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그런 일들은 되돌아봤을 때 깨닫는 법이다. 사건은 과거가 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는다. 내 인생은 이미 많은 운명적 사건들로 바뀌어 버렸다. 나만 모를 뿐이다. 혹은 믿고 싶지 않은 것 이거나. 나는 끝까지 내가 평범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떤 특별함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많은 대학교 졸업반 학생들처럼, 나는 공포에 질려있다. 대학의 정해진 루틴에 몸을 내맡기고 살다 보면 그런 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믿게 되는 모양이다. 모든 시기에는 언제나 끝이 있고, 어느새 끝의 시작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게 벼랑 끝인지, 육상 트랙의 스타트 라인인지는 시간이 지나고 깨닫겠지. 모든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한다는 건 짜증 나는 일이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것처럼,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지금 나는 어른이 된 척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들어섰다. 충분히 연기하다 보면 진짜가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방학을 기다리기만 하던 나에게 다음 방학은 이제 없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빠른 종강을 기원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어떤 말로 학기를 버텨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가장 먼저 보이는 빨간 숫자에 집중한다.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