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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Sep 04. 2022

20 약속은 나가기 직전까지 후회된다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 주말 내내 약속을 잡으면 이렇게 된다. 바로 전날까지 무슨 핑계를 대고 약속을 취소할지 고민하고, 집 밖으로 나가면서도 투덜대며, 가는 내내 집에 갈 생각만 한다. 막상 약속 장소에 가면 생각보다 즐겁지만, 왜 항상 누구와의 약속도 나가기 직전까지 후회하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온몸에 힘을 주고 지하철을 타는 한 시간 내내 서 있는 것. 경기권에서 서울로 가는 약속이 잦은 사람이라면 자주 겪는 일일 것이다. 경기도인이라면 한 시간이 넘는 이동 시간은 놀랍지 않지만, 문제는 앉을 가능성이 조금도 없을 때 발생한다. 앉아서 한두 시간이야 금방 지나가지만, 몇 번이고 갈아타야 하거나 서 있기만 해야 한다면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나와야 하는지, 왜 항상 모든 일을 서울에서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다. 스쳐 지나가는 지하의 어둠에 비친 내 모습은 어디라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약속을 잡고 그 장소까지 나가는 것은 꽤 큰 스트레스 요소이다. 루틴의 항상성에서 안정을 얻는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그 일련의 생활 패턴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디에 언제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전날 밤 침대에서 뒤척이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동시에 나의 긴장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긴장과 불안을 잘 조절하지 못하기에 미리 걱정하고 상상하고 계획을 짜게 된다. 2시까지 가야 하고 한 시간 10분 정도 걸리니까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두 시간 전에는 출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다. 번번이 한 시간 전에 도착하면서 왜 항상 지나치게 일찍 출발 하려는지 모르겠다.


약속의 대상이 싫은 건 아니다. 상대방이 누가 되었든 간에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 그리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의 일련의 과정이 피곤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내 삶의 최대한 많은 것들을 통제하고 싶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통제와 선택의 갈래에서 내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오늘은 이걸 하고 내일은 이걸 하기로 한 나와의 약속이 틀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향인 들은 약속을 연속으로 잡지 않는다던데, 나도 그래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약속 자체는 두세 시간이지만 왔다 갔다 하는 두세 시간, 준비를 하는 한 시간을 포함하면 사실상 해가 떠 있는 ‘하루’가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 긴장에 굳은 몸을 풀려고 누워있다보면 결국 혼자만의 시간도 지나버린다.


나의 내향적인 성향은 쉽게 긴장하는 나의 기질 때문일수도, 혹은 그 기질의 원인일 수도 있다. 뭔가를 하겠다고 나선 적 없는 사람. 먼저 말을 걸어 친구를 사귄 적이 없는 사람. 어떤 ‘장’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 초중고 내내 그렇게 사는 것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부족하기만 한 사회성은 대학에 와서야 겉으로는 크게 티 나지 않는 정도가 되었다. 조별 과제, 발표, 학회, 대외활동 따위가 나를 억지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게 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는 대답을 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공통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 눈치껏 평범한 인간인 척 대화하는 외계인이 된 기분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앉아 있는 법을 배웠다.


고학년이 되면서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어쩌면 ‘어른’이 되는 것에는 그런 능력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의무에 반하는 기질을 무시하는 것 말이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사실 완전히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싶지 않은 일’로 구분되는 것은 없다. 해야 할 일의 단계마다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 선택한 것에 절대로 피하고 싶은 일이 끼어있거나,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의외로 할만한일이 뒤섞여 있는 식이다. 의무는 저주 일수도 운명일 수도 있다. 잔이 절반이나 차 있거나 절반이나 비었거나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그건 힘 빠지는 일이다.




내일은 또 수업 때문에 나가야만 한다. 이 밤이 빨리 지나 내일마저 지났으면. 시간이 쭉쭉 지나 언젠가 행복할 미래로 넘어가 버렸으면. 내 힘으로 행복할 자신이 없는 비겁한 인간은 오늘도 운명에 몸을 맡겨보려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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