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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 Sep 18. 2022

24 아침이 와도 날이 바뀐 걸 눈치채지 못한다




시간은 느리게 시작해 빠르게 흐른다. 문득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깨닫는 순간에 나를 지나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깨닫는 순간 나는 몇 시간씩, 며칠씩, 몇 주씩 늙어버린다. 인간은 끊임없이 오감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만, 의식하지는 못한다. 변화를 눈치채는 순간이 인지의 순간이며, 세상의 속도와는 관련 없이, 그때서야 시간은 다시 흐른다.




꿈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나는 것처럼, 달력을 본 나는 머리를 한데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는 것을 새삼 알아챘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시계와 달력 없이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지 눈치챌 수 있을까? 시계는 인간이 체감하기 어려운 단위의 시간까지 보여주고, 달력은 의식적으로 세지 않으면 쉽게 잊는 날짜와 요일을 알려 준다. 일상을 특별히 여기지 않는 내게 시간과 달력이 없다면 시간은 가기나 할지 의문이다. 비슷한 낮이 비슷한 밤으로 끝나고 비슷한 내일이 오늘이 되는 걸 반복하겠지. 나는 몸이 늙어가는 걸 느끼면서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를 것이다. 세상에 할 일이라고는 없다면 그런 것도 좋겠다 싶지만, 할 일을 찾아야 하는 나에게 가지 않는 듯 사라지는 시간은 두려운 존재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가버리기만 할 뿐이다.


일을 해나가는 나보다, 쌓이는 일들이 더 착실하게 시간을 맞춘다. 나는 허겁지겁 따라가기 바쁘고 어떻게든 내 리듬을 깨 가면서 전체의 스케줄에 몸을 맞춰 넣으려 고군분투한다. 어째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는 일들에 휘말려 이번 주가 전부 지나가 버렸고, 나는 내일의 데드라인을 위해 오늘을 제물로 바쳐야만 한다. 항상 마감에 임박하면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런 느낌조차 없다. 3일 내내 밖에 나가 시간을 보냈더니 알 수 없는 피로에 눈이 건조하다. 자꾸만 드러눕고 싶어 진다. 나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안을 들고 가 교수님을 설득하며 시간을 보낼지도 모른다. 말이 많아 봤자 결과물로 보여줄 수 없다면 헛수고나 다름없다. 빈 강정 같은 한심한 것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할 뿐이다. 억울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지만, 이기적인 존재들은 끊임없이 억울할 일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는 이미지를 만들지만 나는 글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소화해 이미지로 정제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딱히 만들어내는 것이 없어 보여 괜히 마음이 급하다. 아이디어가 확실히 잡히기 전까지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말과 글은 크게 설득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 이럴 예정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걸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같은 말들은 어떤 그림도 그리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두 번째 포스터를 만들고 있는데 나는 주제와 반쯤 관련이 있어 보이는 논문이나 찾아 읽고 있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그렇게 재능이 없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지나치게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가. 쓸데없이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나는 자기 의심과 불안으로 점철되어 있다. 커지는 숫자로 의식하는 시간의 흐름 같은 것들에 괜스레 불안의 원인을 전가할 뿐, 사실 모든 건 내 문제인데. 질문에 질문을 더하다 글만 길어질 뿐, 어떤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 또한 나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계속해서 뭔가를 만들기 위한 정당성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내 존재의 의미 없음을 내가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상쇄해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내가 왜 사는지 따위 관심 없어,라고 말하면서도 밤에 잠 못 드는 존재인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와 연결된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 무게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앉는다면 나 또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게 희망인지 망상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내 존재의 연장선에 있는 것들이 유의미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그렇게 분명히 날짜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가을은 좀처럼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푸른 하늘과 낙엽 대신 몇 번의 태풍에 물을 머금고 부쩍 큰 나무들만 계속되고 있다. 어째 매일같이 따가운 햇빛과 더위만 나를 반길 뿐, 열심히 저장해 둔 스웨터는 입을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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