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남는 시간에 이런저런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구경한다. 가지고 싶은 것이 원래 많았는지 수많은 물건을 보았기에 가지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내 가상의 쇼핑백에 점점 많은 물건이 쌓이고 있다는 점, 그리고 뭔가를 사서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커지기만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일은 아니다. 내가 새삼스럽게 가지고 싶은 것들이 많아진다는 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현실의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기에 물건을 가지는 것을 통해 얻는 빠른 만족감에 집중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뭔가를 사는 일은 별로 없지만, 가지고 싶은 물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물건, 내가 꿈꾸는 공간에 완벽하게 어울릴 만한 물건을 구경한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최저가를 찾으러 돌아다니거나, 살 수도 없을 것들을 찾아본다. 세상은 가지고 싶은 물건, 가져야 하는 물건, 가질 수 있는 물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면에 수없이 떠 있는 물건들은 허상이다. 모든 물건은 어떤 판타지를 포함하고 있다. 특정한 스타일의 물건이 유행하거나 비상식적으로 비싼 물건들이 인기리에 팔리거나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나’의 삶을 상상하는 것이 사실 가장 즐거운 순간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살고 싶은 집, 입고 싶은 옷, 가지고 싶은 가구 따위를 상상해왔다. 집의 형태나 구조, 가구의 질감이나 색감 따위를 세세하게 정하고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기원은 그림책이었다. 나무속에 사는 요정이나 동물들이 나오고, 세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들어있는 식의 책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런 집에서 살고 싶었다. 직접 만든 퀼트 이불이나 나무의 형태가 두드러지는 가구들이 있고 수많은 책에 둘러싸인 환상적인 집 말이다. 세상은 고요하고 언제나 가을이나 겨울에 멈춰있다. 장작을 쓰는 스토브에 빵을 굽고 김이 나는 코코아를 마시는 삶. 부드러운 갈색 스웨터, 두텁고 긴 원피스, 뜨개질로 만든 모자 따위에 감겨 가죽 부츠 아래에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듣는 삶. 싸리 빗자루로 두껍게 쌓인 눈을 쓸고 다정하고 따뜻한 이웃들과 티타임을 가지는 삶 말이다. 딱히 누가 되고 싶다거나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이런 공간에서 이렇게 살아간다면 행복할 텐데, 싶은 생각 정도가 있었다.
아직도 어린 나이지만, 이런 삶 같은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곳이고 돈이 없다면 물건을 가지거나 만들기도 어렵다. 돈을 제대로 벌기 시작해도 딱히 현실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판타지는 판타지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나는 여전히 영원한 가을에 멈춘 이상적인 공간을 가지고 싶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확고하지만 이를 쫓지 않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물건을 사는 것처럼 쉬운 것도 없는데 말이다. 아니, 사실은 물건을 산다고 원하는 삶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한 색과 질감의 스웨터를 산다고 해도 평화롭게 차와 쿠키를 먹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쩌면 영원히 동화 속 이웃집 할머니 같은 사람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인터넷의 많은 사람이 어떤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 사는 공간, 먹는 음식, 입는 옷까지 전부 일정한 스타일과 색감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세상에 그렇게 많다는 게 신기하다. 이제는 개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이자 상품이 된 세상이라 견고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엿보는 이들이 나처럼 정의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실로 흥미로운 일이다. 모든 물건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되는 것들은 항상 판타지의 표상이 되는 모양이다.
매일 일어날 때마다 눈이 건조해진 것으로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체감한다. 해도 조금씩 짧아지고 공기도 서늘해진다. 이불 안과 밖의 온도가 확실히 달라지고 있다. 오후에는 따가운 햇빛에 땀을 흘려야 하지만. 아직 잎이 떨어지려면 더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벚꽃이 피는 시기에 언제나 시험을 보는 것처럼, 낙엽이 쌓일 때쯤의 나는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