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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점 Jan 27. 2021

겨울 산정호수로 떠난 가족 여행

새 사진도 찍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겨울 방학. 큰아이 생일. 여행을 가야 할 이유 두 개가 겹쳤다. 아니, 네 개다. 1년 반 동안 가족여행을 못 갔고, 호텔스닷컴 포인트 유효기간이 거의 다 되었다. 이번엔 반드시 가족여행을 가야 한다.


큰아이는 새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대포만한 망원렌즈도 가지고 있고, 새 동호회에도 종종 들어가는 눈치다. 지난 여름에도 큰아이랑 같이 몇 번 새 사진을 찍으러 갔었다. 이번 가족 여행의 테마도 새 사진으로 정했다. 큰아이 생일이니까. 장소는 산정호수. 이유는? 호수 주변에 새가 많단다.


올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다. 여행 날짜를 정할 때도 이 점을 고려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눈이 오지 않는 날을 골랐다. 월요일에 가서 화요일에 오는 일정. 산정호수 한화콘도를 예약하고 회사에 휴가도 냈다. 아이들은 오랜만의 여행으로 며칠 전부터 들떠있었다. 큰아이는 새 사진 찍을 생각으로. 작은아이는 그냥 여행이니까.


여행 가기 전 금요일. 그 새 일기예보가 바뀌었다.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까지 폭설이 온단다. 기온도 영하 17도까지 내려갈 것이란다. 헐. 예약할 때는 날씨가 좋을 것이라고 그랬는데. 맛집 리뷰만큼 믿을 수 없는 것이 일기예보다. 평소에는 잘 맞다가 꼭 한번 이렇게 초를 친다. 진짜로 눈이 올까? 진짜로 많이 올까? 혹시 눈 때문에 여행을 취소한다면 큰아이는 매우 낙담할 것이다. 미리 걱정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일요일이 되니 모든 뉴스에서 난리다. ‘꽁꽁 언 날씨’, ‘내일 아침 폭설', ‘출근길 비상’. 와이프가 뉴스를 보고 걱정을 한다. 나는 여행은 계획대로 갈 수 있을 테니 괜한 걱정 말라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속으로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여행날, 새벽부터 오전까지 많은 눈이 내렸다.


월요일, 여행날. 불안한 마음에 새벽에 잠이 깼다. 창밖을 보니 함박눈이 내린다. 참으로 탐스럽게도 펑펑 내린다. 눈은 이미 5cm 이상 쌓여 있었지만, 양에 안 차는 듯 계속 퍼붓는다. 딱 봐도 이 날씨에 차를 가지고 나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아직도 마음속은 갈등 중.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콘도 예약한 것은 환불은 해 주려나? 눈 때문이면 천재지변이니 환불해 주지 않을까? 안 가면 큰아이가 실망할 텐데. 그래도 가다가 사고 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중간에 도로에서 고립되면 어쩌지? 산정호수는 외진 데라서 도로가 다 얼어있지는 않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체인을 사놓는 건데. 스프레이 체인으로 버틸 수 있을까? 오만가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침에는 은행에 갔다가 오고, 여행은 점심을 먹고 출발할 계획이었다. 일기예보는 오전 중에 눈이 그친다고 했다. 은행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니 인도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차도의 눈은 거의 녹아 있었다. 경험상 이 정도 눈이면 오후에는 다 녹을 것 같았다. 은행 일을 마치니 12시. 일기예보대로 내리던 눈은 이미 그쳤다. 내 예상대로 차도의 눈도 거의 녹았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에게 말했다. 가자! 산정호수로!


평일이라 그런지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다. 중간에 잠깐 눈이 더 왔지만 흩뿌리는 정도였다. 오히려 곧 구름이 개어 화창한 하늘이 되었다. 두 시간이 지나 드디어 산정호수 한화콘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큰아이가 사진기를 들고 나간다. 혼자 보낼 수 없어 나도 부리나케 따라 나갔다. 콘도 앞에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 다리 밑 개울에는 억새가 누렇게 있었고 작은 새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참새 떼였다. 그런데 큰아이 눈에는 각각의 새들이 모두 다르게 보였나 보다. 참새, 무슨새, 무슨새 알려주는데, 난 이름을 기억도 못하겠다.


갑자기 큰아이 눈이 커졌다. 노랑턱멧새란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름. 나름 희귀한 새인지 부리나케 대포 같은 카메라 렌즈를 겨눈다. 그러나 그 새는 이내 날아가 버렸다. 큰아이가 엄청 아쉬워했다. 처음부터 희귀한 새를 보았으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기대되었다.


그때가 대략 4시.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한 시간 반쯤 남은 시각. 산정호수 중간까지 갔다가 오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호수까지 올라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지만 아침에 내린 눈이 아직 쌓여 있었다. 게다가 비탈길.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산길을 올랐다. 추운 겨울에 눈까지 와서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걷다가 발길을 멈추었다. 주위의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짹짹, 쪼롱쪼롱, 찌륵찌륵.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가까운 곳 먼 곳에서 들렸다. 이따금씩 나무에서 눈이 푸드득 떨어졌다. 새인가 싶어 화들짝 쳐다보면 바람에 눈발만 날리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했다. 내 눈에는 아무 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큰아이는 잘도 찾아냈다. 큰아이가 카메라를 겨눈 곳을 보면 어김없이 새가 있었다.


눈 쌓인 산속에서 찾아낸 뱁새들.


새 탐지에 최적화된 큰아이의 눈과 귀. 타고난 것일까? 훈련의 결과일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새 탐지를 훈련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만, 큰아이는 집과 거리 주변에서도 곧잘 새를 찾아냈다. 같이 걸어갈 때마다 가로수나 길가의 나무속에서 새를 찾아내 알려주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새에 관한 책을 많이 보긴 했는데, 실제로도 이렇게 잘 찾는 줄은 몰랐다.


그동안 큰아이 덕분에 알게 된 것이 많다. 직박구리란 새가 있다는 것. 그것도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 그것도 비둘기보다 많다는 것. 참새처럼 생긴 것이 참새뿐이 아니라는 것. 딱새, 박새, 오목눈이, 무슨새, 무슨새. 나는 들어도 기억 못하는 많은 종류의 새들이, 알고 보면 우리 주변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런 새들은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전설의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내 옆에 있던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큰아이는 오늘도 여러 새를 찾아냈다. 그런데 영~ 성에 안 차는 눈치다. 그런 흔한 새 말고, 산에 왔으니 좀 더 드문 새 사진을 원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호숫가 길을 걸었다. 걷다가 멈춰서 듣다가 걷다가 멈춰서 듣다가. 그러다 갑자기 카메라를 겨누고 셔터를 누른다. 내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니, 나는 새를 찾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따라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경치 사진이나 찍으면서. 마침 하늘이 맑아서 경치도 좋았다.


산정호수 둘레길에서 새 사진을 찍고 있는 큰아이


밖에 나온 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산속의 해는 일찍 진다. 지금은 밝지만 금방 어두워질 것이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산 아래쪽에는 아까부터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뭔 소린가 했더니 송풍기를 이용해서 눈을 치우고 있는 것이었다. 어쩐지, 호숫가 길에 눈이 다 치워져 있더라니. 아마 산정호수 둘레길 눈을 다 치우는 모양이다. 아까 오르막길에 있던 눈도 이제는 다 치워져 있었다. 세상 참 좋아졌다. 예전 같았으면 너까래로 눈 치우느라고 고생깨나 했을 텐데. 요즘은 눈도 기계로 치우는구나. 필경 가을에는 저걸로 낙엽도 치웠을 것이다. 수고하십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내일 아침에는 편하게 오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좀 시끄럽긴 하다.


송풍기는 예초기와 비슷하게 휘발유 엔진으로 가동된다. 그래서 시끄럽고 진동도 심하다. 배터리 기술의 발달로 인해 요즘은 휘발유 엔진이 전기 모터로 전환되는 추세이다. 자동차나 예초기, 전기톱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조만간 송풍기도 전기 모터 방식이 대중화될 것이다. 아마 가정에서 쓰는 전기 청소기 정도의 소음과 진동 정도가 되겠지. 그때가 되면 작업자는 더 편해지고, 산속은 훨씬 더 조용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엔진이 전기 모터로 대체되는 것은 이미 막을 수 없는 추세이다. 그렇게 되면 휘발유의 수요가 점점 줄어들 것이고, 기름값은 점점 더 싸 질 것이다. 코로나로 기름 수요가 줄어든 데다가, 러시아와 중동의 석유회사들의 치킨 게임으로 이미 미국의 셰일가스 회사들은 망해가고 있지 않은가. 줄어든 기름의 수요만큼 전기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다. 추가로 필요한 전기는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화력과 원자력은 공해와 안전 문제 때문에 사장되는 분위기이다. 수력발전소는 지을 곳이 많지 않다. 남은 것은 태양광, 풍력 같은 신재생에너지이다. 요즘은 태양광도 별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늘어나는 전기 수요보다 공급되는 태양광의 속도가 더 빠루니까. 전기 수요가 생각보다 빠르게 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안에 전기 자동차의 공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면 전기 수요도 같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태양광의 앞날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송풍기에서 비롯된 생각이 여기까지 흘렀다.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예상치 못한 곳까지 이르렀다. 산길은 호젓하고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으니, 생각이 제멋대로 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필요도 없고, 막고 싶지도 않다. 이런 게 일상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여행의 묘미요, 즐거움 이리라.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이 보였다. 포천에 왔으면 당연히 막걸리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너 병 사러 들어갔다. 주인아저씨가 큰아이의 대포 같은 카메라를 보더니 아는 체를 한다. 예전에 어떤 아가씨도 비슷한 카메라를 들고 왔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오는 것 같은데, 무슨 산림청 환경부 어쩌구 하는 곳 직원인 것 같던데, 산에 있는 동물 개체수를 센다는 것 같던데, 이거 같던데, 저거 같던데. 큰아이 취미랑 딱 맞는 직업인 듯하여 더 자세히 물어봤지만, 주인아저씨 대답이 영 시원치 않은걸 보아 자세히는 모르는 듯 싶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뜻밖의 수확이었다. 취미로만 생각하고 있던 새 사진 찍기가 직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우연히 알게 된 지식. 여행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


영하 십 몇 도 속에서 한 시간 반을 있었더니 손이 곱아 움직이질 않는다. 콘도 방안에 들어오니 그제야 몸이 녹는다. 우리가 나가 있는 사이, 작은아이는 배가 고프다며 벌써 컵라면에 밥까지 말아 먹었다. 잠시 쉬니 저녁시간. 저녁을 먹으러 어디로 갈까? 와이프가 인터넷에서 근처에 있는 갈비집을 찾아냈다. 역시 포천 하면 이동갈비지. 큰아이도 좋아한다. 그런데, 메뉴판에 소갈비뿐이다. 와이프는 소고기는 못 먹는데, 어쩌지? 와이프가 그래도 가겠단다. 자기는 된장찌개에 밥을 먹으면 된다며. 작은아이는 안 먹겠단다. 이제는 커서, 그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셋만 나왔다. 식당까지 5분 거리였지만 추운 날씨 때문에 눈까지 쌓여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식당에 들어서니 손님이 거의 없다. 평일에 코로나에 눈까지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동갈비 세 개에 우렁된장찌개, 공기밥, 막걸리를 시켰다. 갈비 맛은 그냥 별로. 숯불에 구웠지만 불판이 숯불을 막아서 숯불 맛이 거의 나지 않았다. 양념이 타지 말라고 그런 불판을 쓴 것 같은데, 고기 맛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그래도 고기가 타지는 않았다. 우렁된장찌개는 된장국 같았다. 밑반찬으로 나온 게장도 별로. 막걸리 맛은 쏘쏘. 반찬에서는 플라스틱이 나왔다. 주인에게 보여주니 서비스로 사이다를 한 병 주었다. 후다닥 먹어치우고 일어났다. 10만원이나 주고 먹은 식사인데, 컵라면이 더 맛있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 내가 가는 여행지 식당은 맛있는 데를 별로 못 봤다. 일기예보 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것이 맛집 리뷰다. 누군가는 만족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실망을 했을 것이다. 만족한 사람은 리뷰를 남기고 실망한 사람은 다시 가지 않는다. 게다가 어떤 집은 리뷰를 남기면 할인을 해 주기도 한다. 그러니 모든 리뷰가 칭찬 일색일 수밖에 없다. 내가 맛집 리뷰를 믿지 않는 이유다.


추운 길을 뚫고 다시 콘도로 돌아왔다. 나는 식탁에 앉아서 아까 사 온 막걸리를 홀짝거리며 저녁 식사의 아쉬움을 달랬다. 와이프와 아이들은 거실 바닥에 모여 앉아 주전부리를 먹으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둥, 이래서 힘들었다는 둥, 자기들 유치원 때 선생님한테 혼난 이야기, 친구랑 싸웠던 이야기, 아빠 엄마한테 서운했던 이야기. 옛날에 누가 더 서러웠는지 아이들 둘이 아주 배틀을 하고 있다. 술은 내가 먹었는데 하소연은 아이들이 하네. 집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밖에 나오니까 이런 말을 나눈다. 여행에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


이야기를 들으며 막걸리를 먹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올라왔다. 아까 오랫동안 걸은 것이 피곤했는지 잠이 쏟아졌다.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자면서 들리는 소리에 두세 번 깼던 것 같다. 거실에서는 와이프와 아이들이 여전히 웃음꽃을 피우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내가 없어서 더 분위기가 좋은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빠가 끼면 수다가 재미없다. 진지해지니까.


아마 대학교 MT의 취지가 이런 거였을 것이다. 모처럼 일상을 벗어나서 낯선 곳으로 간다. 모두 처음 와 보는 곳. 낯선 곳에서 느낀 긴장감은 같이 느꼈다는 이유로 동질감으로 바뀌고, 사이를 막고 있던 얼음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한잔 두잔 술이 들어가면서 몸도 녹고 마음도 녹는다. 한명 두명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고, 분위기가 점차 달아오른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왜 품고 있었는지 나도 모르고 있던 이야기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가래떡 뽑듯 쑥쑥 나온다. 그런 것이 단순히 술 때문은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평소에는 하기 힘든 말도 저절로 나오는 분위기. 아이들은 오늘 그런 분위기에 취해 있다.


대학교 때의 MT는 직장에서 웍샵이라는 말로 바뀌어 계속되었다. 하지만 수직 관계라는 한계로 그 취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상사의 비위 맞추기만 할 뿐이다. 상사가 하는 말에 예예 거리기나 해야지, 시키는 대로 바른말 했다가는 밉보이기 십상이다. 간혹 깊은 말을 했더라도 상사는 다음날 기억을 못 할 확률이 높다. 또는 기억을 못 하는 척을 하던가.


생각이 또 엉뚱한 데로 흘렀다. 이제 다시 자야겠다.


콘도에서 보이는 아침 풍경. 저 멀리 산 사이로 보이는 것이 산정호수 폭포이다.


다음날 아침. 완전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바깥은 이미 훤하다. 새들은 해 뜬 직후, 해지기 직전에 많이 활동한다는 말을 들었다. 서둘러 나가야 한다. 큰아이를 깨웠다. 아침이라 어제보다 더 추웠다. 차에서 장갑을 찾아 끼고 큰아이에게도 주었다. 위아래 내복도 입었다. 중무장을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오늘은 어제와 반대방향으로 호수를 돌기로 했다. 조금 가다 보니 멀리서 '도로록' 소리가 들린다. 큰아이 말로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란다. 어릴 적 만화에서만 봤던 딱따구리가 실존하는 새였구나. 신기한 마음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에 숨었나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번엔 저쪽 편에서 '도로로록' 소리가 들린다. 저쪽 편으로 갔더니 아까 거기에서 다시 '도로로록'. 한동안 숨죽여 살펴봤는데 이제는 아무데서도 소리가 안 들린다. 딱따구리들의 농간에 똥개 훈련만 제대로 했다. 더 이상 속기 싫어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눈 덮인 산정호수 위로 떠오르는 해. 아침이 밝은지 한참이 지났는데 이제야 뜬다.


예상했던 대로 바깥은 엄청 추웠다. 추운 날씨 때문일까, 한참을 걸어도 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큰아이가 카메라를 겨눈다. 소나무에 동고비가 있단다. 자세히 보니 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고 그 위에 작은 새 한 녀석이 보인다. 이 줄기에서 저 줄기로 건너뛰는 것은 물론, 줄기를 이리 돌았다가 저리 돌았다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거꾸로 섰다가 똑바로 섰다가, 부산스러워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 녀석은 나무를 자유자재로 잘 타는데, 나무 껍데기를 뜯어 그 안에 있는 벌레를 먹는다고 한다. 군데군데 소나무 가지의 껍데기가 벗겨져 빨갛게 드러난 부분이 바로 이 녀석들의 소행이란다. 몸집은 참새 만한 것이, 소나무에 해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겠지만, 결국에는 저 두꺼운 껍데기를 벗겨버린다니, 먹고 살려는 그 의지가 대단하다. 쓸데없는 감탄을 하는 사이, 동고비는 나무 타기 쇼를 조금 보여 주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나무 타기 쇼를 보여주고 있는 동고비


우리가 간 길은 호수 위에 다리로 놓인 길이었다. 바로 옆은 산이었는데 동고비는 그리로 사라졌다. 산에는 길이 나 있었는데, 왠지 저 길로 가면 새가 많이 있을 것 같았다. 호수는 강추위로 꽝꽝 얼어 있었고 다리는 호수 위 1미터 정도 높이에 있으니, 다리 난간을 넘어 얼음을 건너면 산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만 일단 얼음으로 내려가면 다시 다리 위로 올라올 수는 없었다. 산속의 길이 어디로 통하는지는 모른다. 한 번 모험을 해 볼까? 설마 길을 잃기야 하겠어? 난간을 넘어 얼음 위로 뛰어내렸다. 호수를 건너서 산속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한참을 찾아도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산길은 눈에 덮여 있었다. 갑자기 큰아이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알고 보니 눈 아래는 얼음판이었다. 큰아이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보호했다. 카메라가 잘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히 고생해서 산길로 넘어왔는데, 새는 못 보고 넘어지기만 했다. 인생이 뭐 항상 잘 풀리기만 하나. 잘 안될 때도 있는 거지. 다행히 산길은 호수 둘레길과 나란히 나 있었다. 우리는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결국 둘레길과 만나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눈 덮인 산길을 걸었더니 발이 너무 시렸다. 어제 곱았던 손은 장갑으로 대비를 했는데, 발까지 시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날은 춥고 새는 없고. 시간은 벌써 9시 반. 조금 있으면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 애초에는 호수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 오던 길을 되돌아 가기로 했다.


둘레길 한 바퀴를 돌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서 되돌아갔다.


갑자기 큰아이가 비명을 지른다. 카메라가 동작을 안 한다는 것이다. 아까 넘어졌던 것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추운 날씨 때문일까? 껐다 켜도 안되고, 배터리를 뺐다 껴도 안되고, SD 카드를 뺐다 껴도 안된다. 큰아이는 급 좌절모드가 되었다.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카메라인데, 시험 잘 본 선물로 받은 것인데, 이걸로 새 사진 찍는 게 제일 좋아하는 취미인데, 동작을 안 하는 것이다. 고생해서 찍은 사진을 다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지? 망가진 것은 아닐 꺼야. 너무 추워서 그런 걸 꺼야. 위로해 주었지만 결국 말일 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계속 길을 걸었다.


오는 길에 쇠박새와 굴뚝새를 보았다. 둘 다 큰아이가 발견했다. 발견은 했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에 큰아이는 크게 낙담했다. 내가 핸드폰으로 대신 사진을 찍었다. 쇠박새는 바로 앞에 있어서 폰카로도 찍을 수 있었지만, 굴뚝새는 너무 멀리 있어서 사진으로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었다.


폰카로 찍은 쇠박새(왼쪽). 굴뚝새(오른쪽)는 저기 어딘가에 있는데, 폰카로는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돌아온 덕에 너무 늦지 않게 콘도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컵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짐을 챙겼다. 체크아웃을 하고 차에 올랐다. 나와 큰아이는 어제 오늘 산정호수를 두 번이나 보았지만, 작은아이와 와이프는 구경도 못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었기에, 차를 타고 산정호수 주차장으로 갔다. 거기에서는 5분만 걸어가면 산정호수까지 갈 수 있다.


고장난 카메라 때문에 큰아이는 세상의 모든 의욕을 다 잃어버린 듯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자기는 그냥 차에 있겠단다. 작은아이와 와이프만 데리고 호수를 보러 갔다. 잠시 후 전화가 오더니 큰아이가 오겠다고 한다. 카메라가 다시 동작을 한다는 것이다. 휴우~ 다행이다. 아마 추운 날씨 때문에 일시적으로 배터리가 동작을 제대로 안 했던 모양이다. 큰아이는 다시 정신줄을 찾았고 우리는 다 같이 호숫가를 거닐었다. 새파란 하늘 빛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하늘 빛이 반사되어 호수를 덮은 눈도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호수에 족적을 남겼다.


호수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근처에 있는 비둘기낭폭포를 구경하러 갔다. 그 근처에 한탄강지질공원센터 앞에 있는 빵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식구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나는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틀었다. 어젯밤 잠결에 들은 식구들의 수다가 생각나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푸르렀다. 길은 하나도 막히지 않았다. 여행은 끝나가는데 내 마음은 점점 더 들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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