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55 그대들 죽어지면 그저 자빠져 있을 뿐, 너희에 대한 기억도 갈망도 남지 아니하리니, 이는 피에리아의 장미를 나누지 않은 탓이라. 일단 날려져 버리면 그대들은 흐릿한 망자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리라, 하데스의 집에서조차 눈에 띄지 않는 채로.
※ Reproduced with permission of the Licensor through PLSclear. ※ Rayor, Diane J., trans. & ed. Sappho: A New Translation of the Complete Wor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nd ed. 2023. Introduction and notes by André Lardinois.
<아폴론과 무사 여신들> 예술과 학문의 신 아폴론은 아홉 무사 여신들을 이끄는 역할을 하여 "무사게테스"라는 별칭을 가졌다.
(Peruzzi Baldassare Tommaso, "Apollon et les Muses", ⓒ Archives Alinari, Florence, Dist. RMN-Grand Palais / Nicola Lorusso)
<note>
저주에 가까운 독한 내용의 이 시는 누구를 향한 것일까? 사포 곁을 떠난 동성연인일 수도 있고, 그 연인을 빼앗은 사랑의 경쟁자일 수도 있다. 혹은 사포가 이끄는 공동체에서 이탈한 여성을 거칠게 나무라는 내용일지도 모른다. 유명한 시이니만큼 여러 해석이 제기되었지만, 나는 명성을 떨쳐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으리라는 야망도 없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그저 썩히고만 있는 여성들에 대한 위대한 여성 시인 사포의 일갈이라는 설명에 가장 마음이 간다. 피에리아산은 예술의 여신인 무사Mousa 여신들(복수형 무사이Mousai, 영어로는 뮤즈Muses)이 태어났다고 전하는 곳이다. 피에리아의 장미란 무사 여신들의 활동(음악, 춤, 시, 문학, 학문 등)을 상징한다. 즉 이 시에서 "피에리아의 장미를 나누지 않았다"는 말은 예술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성의 대외 활동이 극도로 제약받았던 고대 희랍에서 평범한 여성이 집 밖을 벗어나 활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합창가무단원으로서 노래와 춤을 배워 축제나 제의에 참여하는 것뿐이었다. 사포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한껏 살려 여성으로서는 실로 드물게 온 지중해 세계에 명성을 떨쳤고, 어쩌면 자신이 이끄는 소녀들도 자신과 같은 성취를 이루기 바라며 열심히 가르쳤을지 모른다. 그랬기에 여자에게 주어진 사회적 숙명에 그저 맥없이 굴복하고 자신 곁을 떠나버린 후배에게 이처럼 노래로써 가혹하리만치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 아닐까?
"기억"은 사포의 여러 작품 속에 등장하는 키워드다. 사포는 몇몇 사랑시에서 떠나가고 없는 연인에 대한 "기억"을 계속하여 상기한다. 또 사포 자신, 그리고 사포와 함께하는 여성들은 후대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 예언한다. 기억을 통해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 죽음으로 육체는 소멸해버릴지라도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불멸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러고보니 사포가 섬겼던 무사 여신들의 어머니가 바로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이 <단편 55>에서 "그대들은 기억되지 않으리라"는 말은 사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