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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현 Jul 31. 2023

사포 단편 44 (Sappho fr44)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결혼

단편 44
 
 
퀴프로스 (…)
사절이 도착했네 (…)
발 빠른 전령 이다이오스가 (…) 전하길
“ (…)
그리고 아시아 나머지 땅 (…) 저물지 않는 명성.
헥토르와 그분 벗들이 반짝이는 눈의 소녀를 데려옵니다.
신성한 테베와 마르지 않는 플라키아에서,
소금 바다 위 배에 태워, 가녀린 안드로마케를.
숱한 황금 팔찌, 향기로운
보랏빛 예복, 빛깔 고운 노리개,
헤아릴 수 없는 은잔들과 상아도 함께.”
그는 그리 말했다. 헥토르의 친애하는 아버지 벌떡 일어서고,
소문은 너른 도시를 가로질러 벗들에게 닿았네.
지체 없이 트로이아 사내들은 잘 달리는 수레에다
노새를 매었고, 부인들과 복사뼈 예쁜 아가씨들의 온 무리가
그 위에 올라탔네.
그들과 따로이 프리아모스의 딸들은 (…)
혼인 안 한 총각들은 전차에다
말을 매었고 (…) 멀리 또 너르게 (…)
(…) 전차 모는 이들 (…)
[                    ]
(…) 신과 같은
(…) 신성한 모임
서둘러 (…) 트로이아로.
풀피리랑 수금의 감미로운 가락은 짝짝이 소리와
어우러졌네. 아가씨들 높고도 달콤하게
찬송가 부르고, 은빛 신성한 메아리가
하늘에 닿도다. 웃음소리도 (…)
거리거리 곳곳마다 (…)
포도주 동이와 잔들이 (…)
몰약과 계피향, 향유가 뒤섞였다네.
부인들 다 같이 환호하고
사내들은 명료하게 소리 높여
파이온을 찾았네, 수금에 능하신 활잡이를.
그리고 모두 신과 같은 헥토르와 안드로마케를 칭송하였도다.   



※ Reproduced with permission of the Licensor through PLSclear.
※ Rayor, Diane J., trans. & ed. Sappho: A New Translation of the Complete Wor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nd ed. 2023. Introduction and notes by André Lardinois.


초현실주의 화법으로 표현한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부부

(Giorgio de Chirico, "Hector and Andromache", 1912, Public domain, via WIKIART)

 


<note>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아 첫째 왕자 헥토르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의 결혼 장면을 묘사한 작품으로서, 남아 있는 사포의 시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다. 서정시(lyric)라기보다는 신화를 읊는 서사시(epic)에 가까워 보인다. 당대 결혼 관습에 따라 신랑 헥토르가 지참금과 함께 새신부를 배에 태워 친구들과 함께 귀환하고 있는 장면으로, 나라의 버팀목이자 자랑이며, 타고난 덕성과 재능이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첫째 왕자의 경사에 왕실 가족은 물론 온 시민들이 들떠서 환호하는 모습이 마치 눈에 보이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Dat dorisCC BY-SA 4.0 , via Wikimedia Commons)



우리는 이 부부, 그리고 곧 태어나게 될 아들의 미래가 어찌 될는지 이미 알고 있다. 헥토르는 밀려오는 희랍의 대군과 영웅들에 맞서 거의 혼자 힘으로 나라를 지키다가 결국 아킬레우스의 창에 목숨을 잃고 벌거벗겨진 채 발목이 꿰어 마차에 매달림으로써 그 시신마저 모욕당할 것이다. 부부의 갓난쟁이 아들 아스튀아낙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할 것이고, 안드로마케는 시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의 원수인 그 네오프톨레모스의 전쟁포로가 되어 끌려갈 것이다. 그뿐인가? 이 노래 속에서 두 사람을 찬양하며 즐거워하는 트로이아인들 대부분 역시 훗날 전장에서, 혹은 불길에 휩싸인 트로이아 시내에서 헥토르 부부와 다를 바 없는 신세에 놓일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런 운명을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마냥 흥겹기만 이 트로이아들의 모습은 더욱 애처롭고, 감춰진 비극성은 한층 더 짙어진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가족을 묘사한 도기(BC 370-360)

전장으로 떠나기 전 헥토르는 부인과 아들에게 인사를 한다. 어린 아들 아스튀아낙스는 아버지의 투구를 보고 무서워 울음을 터트리지만, 헥토르가 투구를 벗자 그제야 아버지를 알아보고 투구깃을 만지며 활짝 웃고, 이 모습에 부모도 함께 웃는다. 이것이 이 세 가족이 살아서 만나는 마지막이 되었다. 일리아스 제6권에 묘사한 이 가족모임은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장면이다.

(Hector's last visit to his family, Jastrow,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전령 이다이오스" : <일리아스>에도 등장하는 인물로서 프리아모스 왕의 마부다.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되찾으러 적진에 들어갈 때 그와 함께 간 늙은 전령이 바로 이 이다이오스였다.
 
* "헥토르의 친애하는 아버지" : 트로이아 왕 프리아모스. 장남 헥토르의 결혼을 보며 기뻐하는 이 행복한 노인은 훗날 살해되고 나서도 능욕당하는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인 자를 찾아가 그 무릎 앞에서 손을 붙들며 애원하게 될 운명이다.
 
* "파이온" : 아폴론의 별칭. <일리아스>에서 아폴론은 대체로 트로이아 편에 서 있다.  




<단편 44>에 음악을 붙여 복원한 영상이 있다. 여성들이 전통악기 반주에 맞추어 희랍어로 합창하는 노래를 듣고 있자면 사포의 시대를 경험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영상 링크 : https://youtu.be/QFkcmrH4X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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