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예복 입은 무사이의 선물을 보이거라, 아이들아. 감미로운 음색의 수금 반주에 춤을 추며. 전에는 내 피부 섬세했으나 이제는 나이 들었네. 내 머리털은 까맸지만 하얗게 세었구나. 내 영혼은 무거워졌네. 무릎은 굽어버렸지. 한때는 어린 사슴인 양 사뿐히 춤추었건만. 나 이따금 한숨 내쉬지만, 어찌하리오? 인간이 늙지 아니할 수야 없는 노릇. 사람들은 전하네, 장밋빛 팔의 에오스는 사랑에 꿰뚫려 대지의 끄트머리까지 티토노스를 데려갔더랬지, 아름답고 젊던 그를. 하나 때가 이르자 잿빛 노년이 그를 붙들어 버렸다네, 불멸의 아내와 함께였거늘. (…) 믿으니 (…) 줄는지도 그래도 나는 우미(優美)한 것들을 사랑하노니, 안다네, 태양을 향한 사랑이 날 찬란하고 아름답게 해 주었음을.
※ Reproduced with permission of the Licensor through PLSclear. ※ Rayor, Diane J., trans. & ed. Sappho: A New Translation of the Complete Wor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nd ed. 2023. Introduction and notes by André Lardinois.
<아우로라(에오스)와 티토노스>
불멸하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젊고 아리따운 모습으로 가볍게 하늘로 날아오르며 밤하늘을 걷어내고 여명을 밝힌다. 반면 그의 남편 티토노스는 늙고 초라하며, 어둠 속에 그저 힘없이 누워있을 뿐이다. ("Aurora y Thyton", 1896, Sebastiano Ricci, CC0, via Wikimedia Commons)
<note> 나이듦에 대한 한탄과 위로를 담은 노래다. 티토노스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유명한 신화를 인용했기 때문에 일명 <티토노스의 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포 자신, 혹은 사포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많은 합창가무단의 리더가 어린 소녀들로 이루어진 단원들과 어울려 공연할 때 불렀던 노래일 것이다. 아마 중년을 넘겼을 화자는 함께 공연하고 있는 앳된 소녀들, 그리고 한때는 어린 사슴 같았던 기억 속 젊은 자신과 대비하며 노년의 쓸쓸함을 한층 짙게 느끼고 있다. 아마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청중이라면 누구라도 그 정서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앞서 읊었던 울적함을 단번에 살라버리듯, 자신 안에는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여전히 불타고 있음을 노래한다. "태양을 향한 사랑"이란 무엇을 뜻할까? 이 시를 인용한 고대 희랍의 저자 아테나이오스(서기 200년경)는 이 문구를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석했다 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육체가 늙어가는 거야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일이로되, 한결같이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며 인생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두고 누가 함부로 늙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포를 떠올려보자. 틀림없이 그는 나이가 얼마나 들었든 죽는 순간까지 동시대 그 어떤 남녀보다 젊고, 뜨거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시를 번역하다 보니 문득 무척 좋아하는 노래인 왁스의 <황혼의 문턱>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사포의 이 시와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세월의 무상함을 읊던 노래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을 장식하는, "꿈이 있기에 지금도 행복하다"는 노랫말이 특히 그렇다.
* 무사이Mousai : 예술의 여신인 무사Mousa의 복수형이다. "무사들", 혹은 "무사 여신들"이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영어로 Muses. * 에오스 : 새벽의 여신. 희랍 신화에서 에오스(EOS)는 "새벽"을 상징한다. 희랍 사람들은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 에오스가 처소를 떠나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했다. 로마시대 들어 에오스는 라틴말 "아우로라(AURORA)"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이것이 곧 영어 "오로라"의 어원이 되었다.
<티토노스를 쫓는 에오스>(BC 470-460). (다만, 오른쪽의 남자는 티토노스가 아니라 에오스의 또다른 연인인 케팔로스일 가능성도 있다.)
* 티토노스 : 희랍 신화에서 트로이아 왕족들 중에는 신들도 홀릴 정도로 잘생긴 미소년들이 유난히도 많이 등장한다. 티토노스(참고로 트로이아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형제다.) 또한 절세의 미남이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티토노스를 보고는 한눈에 반한 나머지 그대로 납치하여 대지의 끝 자신의 거처로 데려가 버린다. 티토노스도 완전히 타의로 끌려간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티토노스의 미모에 푹 빠진 에오스는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달려가 남편이 된 티토노스가 "영원히 죽지 않게 해달라"며 간청하고, 제우스는 의미심장하게 그 부탁을 들어준다. 그러나 에오스는 뒤늦게야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티토노스가 죽지 않게 만들어달라고만 했을 뿐, "늙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은 빼먹은 것이다. 하나 이제 되돌릴 수 없는 노릇. 세월이 흐를수록 티토노스는 나이를 먹어가며 차츰 젊었던 시절의 미모를 잃어갔다. 중년과 노년을 넘어, 인간이라면 마땅히 숨을 거두었어야 할 나이를 한참 넘겨서까지 죽지도 못한 채 육신만 계속하여 쭈그러 들게 된 티토노스. 에오스는 처음엔 나름대로 책임감을 갖고 남편을 보살폈으나 차츰 지쳐버렸고, 이젠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티토노스의 추한 몰골과 괴상한 울음소리에 진절머리가 난 나머지 티토노스를 방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전부 지켜보던 제우스는 티토노스를 측은히 여겨 그를 매미로 변신시켜주었다고 한다. 안티에이징, 노화를 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가를 가르쳐주는 고대 희랍인들의 통찰이 담긴 유명한 신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