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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Jan 08. 2022

산티아고 순례길, 몰리나세카~빌라프랑카, 30.53km

25. Day22, 거절

거절. 이 순례길에서 내가 배운 단어이다. 누구나 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이곳에서 자신만이 가지고 온 원칙을 깨고 싶지 않아 한다. 


 오늘은 친구들과 말없이 걸었다. 사실 어제 사람들이 취해가지고 술을 더 먹자고 했었는데, 내가 그냥 들어가 자버린 것. 시간도 10시가 다 되었고,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미 취해 있었고, 그냥 들어가려 하길래 먹을 것도 뺏어가고, 핸드폰도 뺏어갔는데 신경도 안 쓰고 들어가 잤다. 친구들도 적잖게 당황했을 것이다. 친구들이랑 같이 걷고 있지만 혼자 걷는 것보다 오히려 더 혼자 걷는 느낌이었다.


 거절. 순례길에서 내가 배운 또 다른 단어이다. 순례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온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온 이 길 위에서 자신만의 원칙을 깨고 싶지 않고 싶어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긍정적이고, 겸손한 자세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나를 위해서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아닐 때 아니라고 말하는 '거절'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이때 배운 경험은 현재 나의 사회생활에 있어 나를 위해 살아가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결국 나 혼자 걷게 되었다. 폰페라다에서 오늘 목적지인 빌라프랑카까지 23km 정도 되는 거리를 단 한 번도 쉬치 않고 걸었다. 가는 길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 날씨가 맑았다 했는데, 비가 오고 순식간에 개는 스페인의 날씨가 너무나도 신기했다. 일출 후 비치는 폰페라다도 예뻤고, 포도밭길 모두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가장 와닿는 말은 '순례길은 혼자이면서도 함께 걷는 길, 함께이면서도 혼자 걷는 길'이라는 다소 아이러니한 말이다. 흔히들 길을 인생에 많이 비유하곤 하는데, 아무리 외향적이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은 현실 속에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혼자여야 할 때가 있다. 그러기에 삶과 순례길은 참 닮으면서도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오늘은 정말 빨리 걸었다. 나보다 한 마을 앞에서 출발한 한국인 친구들을 따라잡았다. 7km 정도 앞에서 먼저 출발했을 텐데 같이 도착한걸 보니 오늘 얼마나 빨리 걸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오늘 도착한 빌라프랑카란 마을은 정말 예뻤다. 다음날 산을 올라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꼭 하루를 묵는다. 참고로, 나중에 나영석 PD가 차승원, 유해진과 같이 찍은 <스페인 하숙> 촬영지도 바로 이 마을이다.



 마을에서 어제 일이 있었던 친구들을 포함해 모든 일행이 다 모였다. 그리고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마냥 다시 친해지고, 즐겁게 와인을 마시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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