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분투하다

by 북극성 문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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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분투하다 - 날다의 편지


보나에게,


최근 들어서 노트북을 갖고 다니질 않았어. 오늘은 마지막 제철 편지를 연필로 (실은 샤프...) 써서 보내봐. 사전에 너한테 말했던 마지막 주제는 <가을과 투박하다>였는데 투박하다의 정확한 뜻을 혹시 알고 있니?


1) 생김새가 볼품없고 둔하고 튼튼하기만 하다
2) 말이나 행동 따위가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다


나는 "투박한 맛이 있다"라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막상 단어의 뜻을 보니까 생각보다 긍적적인 느낌은 아닌 거야. 오히려 단어의 뜻만 놓고 본다면, 김첨지가 생각이 나고! (설렁탕 사 왔는데 왜 먹질 못해의 주인공) 그래서 투박하다에 자음만 동일한 '분투하다'라는 단어를 함께 데려와서 이야기를 만들었어.


투박하게 굴러가는 지구에서 분투하는 사람들.

서로를 보듬는 일에 시간을 쏟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초대했어.

나는 분투하는 지구 사람들이 더 따듯한 연말을 보냈으면 좋겠어.


그러면 이야기 시작할게.


가을과 분투하다


어릴 적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고, 펑펑, 콧물까지 훌쩍이며 운 적이 있어.

그때 내 나이는 다섯 살이 아닌, 스물다섯이었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그늘, 가지, 사과, 줄기, 심지어 그루터기까지 소년에게 내어준다. 내어줄 무언가가 있고, 그걸 기꺼워하며 받는 누군가가 있음은 얼마나 축복일까. 내 곁엔 무언가를 내어주기엔 자기 삶도 퍽퍽하고, 바삭바삭한 낙엽 같은 사람들만 있었어. 옆에 앉아 곁을 부비려고 하면, 낙엽 밟듯, "바사삭", 수분 없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어.


이십 대, 물기로 가득한 저녁. 버스에서 사람에 치이고 그냥 울어버리고 싶은 날들을 반복하면서도 오기와 깡으로 버텼어. 때때로 나에게도 동화 같은, 아니 연말 뉴스에서 본 것처럼 은사라든가, 귀인이 찾아오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 오히려 나를 괴롭게 하는 인간들만 좀 없어도 살 것 같았지.


나는 거칠어지고, 가꿀 새 없었으며, 그럼에도 아주 아주 튼튼했어. 튼튼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으므로. 그리고 지금, 내 눈 앞엔 스물다섯, 그냥 세상 떠나가라 울어버리는, 나를 닮은 네가 있어. 너는 망설이지 않고 덥석 악수를 청했어. 어떤 두려움도 없이 세상이 궁금하다고 말해. 해맑게 소리 내 웃어. 나를 닮았으나 너는 달랐어. 이내 울음을 그치고 숨기기에 급급했던 나와 달리, 너는 울 때도 어깨까지 들썩이고, 울고 나서도 후련하고 개운하다는 듯이 감정을 마구 표현했어.


나는 너의 아낌없는 나무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 한 소년에게 모든 것을 준 나무처럼 그늘도, 가지도, 사과도 무엇 하나 없었어. 나에게는 긴 세월을 버텨오며 단련해 온 튼튼한 기둥이 있을 뿐이었어. 튼튼한 밧줄을 가져와 그네를 매달았어. 네가 언제든 쉬어갈 수 있도록, 내가 여기에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어.


너는 정신없이 바빴지. 바쁜 와중에도 그네에 머물며, 쉬면서 재잘대다가 돌아갔어. 나는 더욱더 해주고 싶은 게 많았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많지 않았어. 너는 나의 나이테를 궁금해했어. 나조차도 아직 볼 수 없는 나이테를 너로 인해 생각하고 떠올렸어. 내가 겪은 아픔과 상처, 그리고 분투의 시간이 고스란히 흔적으로 남아있지.


선명한 나이테를 너는 궁금해했고, 이내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너도 그 나이테가 자신의 봄에도 어딘가에 그어지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지. 볼 순 없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말이야. 비슷비슷한 나이테를 갖게 되더라도.
네가 덜 아프면 좋겠어. 나에겐 내 나이테의 모양과 깊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런 마음으로 나는 너를 지켜본다.


언젠가 나는 너의 낙엽을 보게 될까?


세상살이에 지쳐서 버석버석해진 너의 낙엽을 보고 싶지는 않아. 촉촉하지만 온몸 서늘해지는 가을비. 그래도 살아있음을 저릿하게 느끼게 해주는 생명력 넘치는 비. 너의 낙엽을 내가 혹시라도 보게 된다면, 그 부드러운 가을비가 내릴 때 우리 함께 서로의 낙엽 모양을 같이 살펴보면서 대화 나누자.


비 맞아 촉촉해진 낙엽을 보면, 좋은 봄 지나고 쨍한 여름 지나서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이 왔음이 실감 날 거야. 정신없이 흐른 시간이 미워 죽겠더라도, 칙칙한 아스팔트 바닥을 알록달록하게 만드는 계절을 그래도 애정이 어리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덜 외롭도록 나는 네 곁에 있을게.


보나의 답장과 음악


날다에게,


이제 마지막 제철 편지로군… 이번에도 글 잘 읽었어. 투박하다는 단어 나도 참 좋아해.


음악도 정제된 사운드보다 날것의 사운드가 더 좋게 들릴 때가 있거든. 잘 다듬기보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태도가 좋달까? 분투하다는 단어는 또 다른 결로 좋네. 사람들은 다들 고군분투하면서 살잖아? 모두가 각자 다른 이유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지. 그래서 사람이 참 좋을 때도 미울 때도 있는 것 같아. 분투…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는 단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


이번 글에서 본 ‘나이테‘라는 단어에 꽂혀서 노래를 만들었어. 서로의 나이테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했지.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마음을 응원한다는 생각으로. 투박한 멋을 내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된 것 같아. 투박한데 멋지기까지 하려면 스스로와 엄청 치열하게 싸워서 솔직함을 얻어내야 하는 것 같아.

나 자신과 계속 싸워볼게. 잘 분투할게!!


그럼, 이만…

시간이 지나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ni-LWxqdX-Y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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