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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pybara Apr 03. 2022

점, 선, 면

기하학적 메타포

상상 하나 해 보자. 우리의 경험들이 점⦁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이다. 커피를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낮잠을 자고, 영화를 보는 일련의 경험들 말이다. 경험의 단위 정도야 당신 마음대로다. 상상하였는가?


그 점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미세한 간격으로 놓인다. 분절된 그림들이 연속된 장면을 이루는 한 편의 애니메이션처럼, 점들은 따로 존재하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다. 그들 사이의 불연속성을 생각하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이윽고 점이 늘어선다. 작고 검은 시간의 알갱이들이 잘 훈련받은 병정들처럼 곧게 행렬을 늘인다.


그렇게 선−이 만들어진다. 질량을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의 추상체들이 모여 직선의 모습을 구축한다. 선은 한 방향에서만 오지 않는다.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성된 점들이라 해도 조건에 따라 동시다발적으로 놓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그것은 한 선의 중반부를 담당하면서도 또 다른 선의 대가리가 되기도 한다. 점은 그토록 자유롭고, 외로운 것이다. 자신만이 자신의 위치와 존재를 보증하기에 그렇다. 단일의 형태로 존재하나 연속성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찾는 것들이 지니는 숙명이다. 선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야 점의 의미가 언급되고 있듯이. 선을 이루는 점의 배치는 인과의 메커니즘 속에서 임의의 형태에 가까우리만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뤄진다.

선은 그 자체로 분리다. 선을 중심으로 구별이 이루어진다. 선이 이것(This)과 저것(That)을 나눈다. '이쪽'은 나의 영역이다. '저쪽'은 나 아닌 것들의 영역이다. 경계로서의 선의 분명함은 점의 농도에 따라 좌우된다. 경험의 농밀함이 구별의 강도를 결정짓는 셈이다. 순간에 대한 경험이 세밀하고 충실한 만큼, 경계는 확고해진다. 각자의 방향에서 일자로 뻗어 온 선들은 한 지점에서 각을 이루며 만난다.


면□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다양한 개수의 선이 만나 다각형을 이룬다. 닫힌 울타리가 완성된다. 영역의 구별을 넘어, 구체적인 형체를 갖춘 '나', 개인이 탄생한다. 이때 '나'는 경험의 선행조건인 동시에 경험을 통해 생성되는 존재임이 드러난다.

선행조건으로서의 '나'는 시초의 점일 뿐이다(그토록 자유롭고, 외로운). 바로 그다음에 이어질 점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내가 아니다. 수많은 외적 요인이 한데 작용해 다음 점의 위치를 결정한다. 이어지는 인과의 과정 속에서 '나'를 이루는 일종의 관성이 생겨나고, 관성에 따라 뻗어 가는 직선 위에서 곁가지를 뻗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선은 분열한다. 내가 경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나를 이룬다. 경험을 통해 무한히 존재하는 나의 근거가 있을 뿐, 별도의 실체라 부를 수 있는 '나'는 무한한 공간 위의 점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것으로 여겨지는 경험들은 나를 규정하는 울타리가 되기에, 경험을 통해 생성된 '나'의 지각적 다발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인의 표상인 면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것은 이등변삼각형일 수도, 직각사각형일 수도 있다. 점들의 행렬은 각기 다른 변수 속에서 생성되었기에 필연적으로 그렇다.

하지만 개인 간에 경험의 공유가 일어나면 도형들은 선을 맞댄다. 어떤 경험도 온전히 나만의 것일 수만은 없다. 얼마나 직접적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경험은 그 자체로 공유를 전제한다. 제각기 모습과 형성 과정이 다른 다각형들이 사실은 면 사이에 맞닿은 선을 통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선을 공유하는 다양한 도형들이 거대한 퍼즐처럼, 조각조각 맞춰진다. 점과 점이 교차하고 선이 합일한다. 화해할 수 없을 것처럼만 보였던 이등변삼각형, 직각사각형, 정십이각형, 평행사변형이 또 다른 면을 매개로 만나고 이어지고 결속한다. 그처럼 모이고 모인 다각형의 집합체는 점차 다면체를 이룬다. 이때 다면체를 이루는 면의 개수는 무한에 수렴하여, 구(球)의 형태가 된다.


그렇게 지구가 탄생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메타포이다.

점과 선과 면은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방금 고안해 낸 불완전한 상징적 기호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이 메타포가 아니란 말인가?

 

물자체 같은 걸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사이의 선이 맞닿는 부분에 존재하는 작은 만큼이나 큰 공백을 메꾼 뒤에야

비로소 공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건데

그 공백은 무형의 것이어서,

직접 아닌 간접으로만 가 닿을 수 있는 것.

메타포의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문자가 추상과 불립문자의 우주에서 가까스로 형태를 갖추고

마음과 마음, 존재와 존재 사이의 아스라한 거리를 좁히는 곳이다.


그 무엇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동굴처럼 깊은 해석의 여지를 가진 채 하나의 상징으로 남겨질 뿐.


당신은 무엇의 메타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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