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주일'을 '머슴주일'로 바꿉시다!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 요한복음 10,11-18

by 글방구리

지난 2월, 양을 아주 많이 키우는 어느 나라에 다녀왔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남반구는 어떤 곳일까, 이런저런 기대와 설렘이 있었습니다만, 그중 하나가 양 떼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목자와 양에 대한 비유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제가 오래전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는 양 떼는커녕 양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목장에서 방목 중인 양 떼를 처음 보았을 때는 "와아아아! 저 양들 좀 봐!"라고 감탄했으나, 하루이틀 반복되는 광경을 보면서 감탄은 조롱으로 바뀌었지요. "양들이 징글징글 많네. 꼭 구더기 떼 같지 않니? 쟤네들은 어쩌면 저렇게 하루종일 먹기만 하냐?" 털이 깎인 양 떼들은 양이 아니라 개 떼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성서의 배경과 제가 방문했던 나라는 지형과 기후, 시대적 차이가 있어 다르겠지만, 들판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도 볼 수 없었답니다.


이번 주는 부활 4주일입니다. 성소(聖召)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전례력에는 씌어 있지 않지만 전에는 '착한 목자 주일'이라는 말도 썼던 것 같아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착한 목자론(?)입니다. 목자와 양, 삯꾼과 이리 등은 유목민이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근한 비유였겠죠. 교회가 성소주일이라고 정한 뒤에 이 복음을 배치했는지, 아니면 이 복음이 정해져 있기에 착한 목자주일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성소주일을 앞두고 신학교와 수도원은 바빠집니다. 오픈하우스라고 하던가요, 평소에는 닫았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제성소와 수도성소를 택한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는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때문이죠.


사제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속도는 우리나라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가파르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령화, 노령화도 가속화되고 있고요. 본당에 파견된 수도자들은 인성 좋고 신앙심 깊은 청소년들을 점찍어 놓고 그들이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에 관심을 갖도록 매우 공을 들입니다. 아마 이번 주에도 많은 주일학교 아이들과 예비신학생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신학교와 수도원을 찾겠지요. 일반적인 삶과는 다른 양식을 택하고 살아가는 선배 사제와 신학생, 수도자의 모습을 보고 낯설어하거나 신기해하면서 기억에 남는 하루 소풍을 다녀올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성소주일 행사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뿐 아니라, 밖의 사람들을 맞이하는 신학생, 수도자들에게도 신선한 체험입니다. 남들이 가지 않은 사제 수도성소를 받아들인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고, 그런 길을 열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물론 조용한 침묵의 삶을 살다가 밖의 바람을 너무 세게 맞는 통에 그날 저녁 묵상시간은 분심과 잡념이 더 강하게 들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날 본당에서 어떤 강론을 들으시나요?

제가 다녔던 본당에서는 "오늘은 성소주일이지만, 성소주일이라고 사제 수도성소만 있는 게 아니다, 결혼성소도 성소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성소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한다"라는 주제로 듣곤 합니다. 여기에 "주변의 많은 청소년들이 사제 수도성소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라는 부탁이나 "사제 수도성소는 부모의 기도를 먹고 큰다"라는 등의 말도 듣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강론이 살짝 불편합니다. 정말 사제 수도성소와 결혼성소가 동등하다면, 많은 청소년들에게 굳이 사제 수도성소에 관심을 가지라고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보다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을 잘 식별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요청을 해야겠지요. 또한 결혼성소는 부모의 기도를 먹고 크는 게 아니랍니까? 오히려 부모의 기도가 자녀에게 사제 수도성소를 주입시키려는 의도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아이에게 주시려는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잘 알아보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거죠(사실 저도 아이가 어릴 때 은근히 사제 수도자의 길을 가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만, 그게 아이에게 압박감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 그 마음은 접었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를 교회 내의 사제로 비유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 고백을 받으신 뒤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고 말씀하신 부분에 근거하고 있다고 추측합니다(요한 21, 15-19 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만 보자면 예수님은 당신이 착한 목자라고 하시지, 제자들에게 착한 목자가 되라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목자가 되려면 무조건 착해야 합니다. 착하지 않은 목자는 목자도 아닙니다. 양을 모르고, 양에게 관심이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니라 삯꾼입니다. 제가 경험한 어떤 목자만 해도, 목자는커녕 도적과 같은 자도 있었습니다(신자들이 모아 두었던 사회복지기금을 다른 본당으로 이동하면서 가져간 사람, 전례상 실수를 했다고 제의실에서 어린 복사의 뺨을 후려친 사람, 기도해 주겠다고 여신자들을 눕혀 놓고 성추행을 하던 사람 등.). 비록 아주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런 못 돼먹은 자들도 사제성소를 처음 받아들였을 때는 자신이 이렇게 타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처럼 겸손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어느 순간 예수님이 계셔야 할 목자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해 버린 잘못을 저질러 버린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제들에게는 필경 "목자의 자리를 넘보지 마라!" 하고 호통을 치실 겝니다.


그래서 저는 성소주일에 사제 수도성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착한 목자'보다는 예수님이 '너희도 나처럼 하라'라고 직접 본을 보여주셨던 대목을 복음 말씀으로 들려주면 좋겠습니다. 그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제자로서 해야 할 일이 명료합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고 보여주신 사례도 없을 듯합니다.


우리 세시풍속에는 '머슴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음력 2월 1일, 앞으로 바빠질 머슴들에게 일 년 농사를 부탁하고 위로하는 뜻으로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머슴들의 명절이지요. 또 춘분 무렵이 되면 머슴떡을 해서 돌렸다고도 합니다. '성소주일'이라는 말도 '머슴주일'이라는 말로 바꾸면 어떨까요? 사제 수도자들은 양 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일꾼, 머슴이어야 하니까요.


요즘 양 떼들은 어리숙하지 않아서 일하지 않는 목자를 목자로 따르지 않습니다. 부와 명예, 자신의 편리함을 찾지 않으며,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는 착한 머슴, 착한 일꾼들을 따릅니다. 그들은 머슴처럼 일하면서도 늘 기쁨에 가득 차 있지요. 내가 착한 목자입네, 하지 않아도 그런 사람이 내는 향기는 널리 널리 퍼져 갈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마더 테레사처럼요.


아, 그럼 저 같은 양은 어찌해야 하느냐고요? 글쎄요, 적어도 구더기 같다는 오명은 쓰지 않게 살아야겠지요? 내가 양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구더기처럼 살고 있는지, 우선 그것부터 잘 식별해 보아야겠고요.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는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Ich bin der gute Hirte. Der gute Hirte läßt sein Leben für die Schafe. Der bezahlte Knecht aber, der kein richtiger Hirte ist, weil ihm die Schafe nicht gehören, sieht den Wolf kommen und verläßt die Schafe und flieht; und der Wolf fällt über die Schafe her und zerstreut sie. Denn der Knecht arbeitet ja nur um Lohn, und an den Schafen liegt ihm nichts. Ich bin der gute Hirte und kenne die Meinen und die Meinen kennen mich, wie mich mein Vater kennt und ich den Vater kenne. Und ich lasse mein Leben für die Schafe. Ich nabe noch andere Schafe, die sind nicht aus diesem Stall; auch sie muß ich herführen, und sie werden meine Stimme hören, und es wird eine Herde und ein Hirte sein. Darum liebt mich mein Vater, weil ich mein Leben lasse, um es wiederzunehmen. Niemand nimmt es von mir, sondern ich lasse es freiwillig. Ich habe die Freiheit, mein Leben zu lassen, und ich habe die Freiheit, es wiederzunehmen. Dies Gebot habe ich von meinem Vater empfa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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