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에서 민주지산까지- 방랑하는 곰들
올림픽, 신화의 재현과 곰돌이 푸
2018년 2월 27일, 평창 올림픽 주 경기장인 강릉 아이스 아레나. '은반'이라고도 불리는 얼음 위엔 이 대회 내내 최고의 화제를 몰고 다녔던 한 선수가 등장했다. 일본의 '피겨왕자'로 불리는 스케이터 하뉴 유즈루였다. 올림픽 결승이라는 큰 무대인데다가 광적인 팬들이 많기로 유명한 꽃미남 스포츠 스타인지라, 아레나는 어느 경기보다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그의 올림픽 퍼포먼스 테마는 '세이메이'. 고대 일본의 가장 강력한 주술사였고 의사, 학자였으며 대중문화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미남자로 형상화되곤 하는 실존 인물이다. 하뉴는 헤이안 시대의 의상을 변형한 코스튬을 입고 일본 전통 음악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서양의 음악과 캐릭터 일색인 여타 피겨 프로그램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루틴이었다. 일본의 전통 피리소리가 날카롭게 퍼져 나가고 둥둥둥 하는 북소리가 가슴을 때리자 선수는 서서히 전설적인 주술사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극도의 긴장감, 완전히 연기에 몰입한 선수와 관중들의 호흡이 하나가 되어 경기장은 마치 고대 의례의 한 부분을 옮겨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결과는 피겨 남자 싱글 부분에서 66년만에 나온 2연패와 영웅의 탄생. 동계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기억할 만한 밤이었다.
고대 일본의 주술사로 분한 선수.
의상부터 안무까지 높은 평가를 받은 프로그램으로 수 차례 반복 사용된 바 있다. (출처:네이버)
갑자기 2018년으로 시공간을 옮긴 이유는 그날의 경기에서 현대판 '신화적 세계' 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화적 세계란 아주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이는 다양성의 세계이고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억압하거나 군림하지 않는 평등한 대칭성의 세계라고 정의된다. 앞서 보았던 퉁구스 부족들의 삶에 정령, 동물, 인간, 숲과 마을이 공존하고 인간과 동물이 연을 맺어 후손을 낳듯, 이 세계에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지고 참여자들 사이엔 특별한 연대의식이 형성된다. 6년 전 강릉 아레나는 올림픽이라는 강력한 신화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고대의 주술적 몽환과 현대의 과학, 순수함과 상업주의, 과거와 현재 등이 혼재하며 현대적 신화 창조의 용광로가 되었다. 선수뿐 아니라 모두가 잠시나마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여 열정적으로 퍼포먼스에 참여했고 그 결과 새로운 영웅 신화가 쓰여졌으며 관객은 일종의 황홀경을 경험했다. 아마도 현대 문화에서 대형 스포츠 대회가 신화적 세계의 흔적을 가장 확실히 드러내는 장일 듯하다.
그러나 무언가 아쉽다. 주술사로의 탈바꿈은 너무 일시적이다. 고작 4분 30초 동안의 퍼포먼스일 뿐이고 전기로 얼리는 얼음에선 기계적인 국가주의의 냄새가 진동한다. 이런 신화적 세계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상징적이고 압축적인 신비’를 충만하게 느끼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그날의 퍼포먼스를 장식한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팬들이 던진 ‘곰돌이 푸’ 인형에서 잃어버린 신화의 세계가 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 작은 인형은 선수가 애지중지하는 ‘신성함’이다. 유즈루는 ‘푸’로 자신의 방안을 가득 채우고 휴지 케이스에까지 부착하여 늘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경기 전 푸를 만지면 마음이 가라앉고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팬들에게 전파되어 어느 순간부터 빙판에 ‘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창에서도 경기가 끝나자마자 빙상 연맹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던진 노란 곰 인형 '푸'가 은반을 뒤덮었다. 다음 선수를 위한 매너가 아니다, 올림픽의 공식 마스코트가 아니다, 혹은 '미신'이 아니냐는 질책과 항변과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곰돌이 푸는 미지의 힘을 내뿜으며 얼음 위를 장악했다.
곰 인형은 어느 지역에서든 보편적인 인기를 누린다. 이것이 우연이 아닌, 신화적 세계에서 곰이 보여준 치유의 능력과 통하는 것은 아닐까. (출처: 네이버)
그리고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비록 미약하긴 하지만, 오래전 숲 속을 거닐던 툰드라의 주인을 떠올렸고 그가 가졌던 영험한 권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퉁구스의 곰들과 인형 ‘푸’ 사이엔 투명하지만 분명한 연결점이 그어진다. 우리의 곰들은 왜 그렇게도 특별하고 영험한 것인가. 신화는, 신비함의 세계는 아직 살아있을까. 이제 다시 퉁구스의 숲이 그려진다. 눈이 쌓인 숲 속, 빛나는 자작나무 아래를 걷고 있는 곰들이.
무너진 곰들의 세계, 신화의 죽음
곰은 남극과 아프리카, 호주를 제외한 모든 대륙에 서식하고 유럽 지역과 북미에서도 크게 추앙되었다. 그러나 동북아가 그 어느 지역보다도 곰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 왔다. 퉁구스 곰 신화 연구로 유명한 한스 요하임 파프로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어떤 지역도 이토록 가혹한 삶의 조건을 가지지 못했고 그 어느 지역에서도 동물과 이런 종류의 유대감을 맺지는 못했다.
동물과 긴밀한 유대를 맺었다고 하여 퉁구스의 삶이 디즈니 월드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신화는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 탄생하여 삶의 잔인함을 이겨내려 탄생한다. 다음 예벤키족의 이야기에서 그 단편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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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툰드라에 큰 한파가 몰아쳐 모든 생명들이 사라졌다. 순록들이 죽고 인간도 극심한 굶주림을 맞아 견디기 힘들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여태까지 먹지 않았던 이웃의 토끼를 먹기로 한다. 예벤키 마을의 가장 지혜로운 노인이 병든 척하고 이웃 토끼 마을의 샤먼을 불렀다. 샤먼을 먼저 처치해야 상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샤먼 토끼는 아무것도 모르고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노인의 집으로 왔다. 노인의 집에 건장한 아들들과 마을의 청년들이 각각의 무기를 숨기고 있는 줄도 모른 채로, 그들은 노인의 병을 위한 춤과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나 신기가 오른 샤먼 토끼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의례 중에 저도 모르게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을까 ' 하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숨어 있던 장정들이 한꺼번에 샤먼 토끼 일행에게 덤벼들어 모두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곧장 토끼 마을로 쳐들어가 남은 마을 토끼들도 남김없이 살해하고 그들의 식량을 앗아와 다음 해 봄까지 연명했다. 이때부터 예벤키들은 본격적으로 토끼를 먹기 시작했고, 단 하나 살아남아 도망친 샤먼 토끼는 다른 지역에서 야생 토끼들을 번식하며 겨우 살아갔다. 그리고 도망칠 때 예벤키 노인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져 지금도 구부러진 다리 모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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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이웃의 토끼 부족이란, 아마도 가까운 숲에 사는 작고 약한 부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근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들을 약탈하지 않았으나 굶주림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속이고 살육한다. 또 다른 부족인 돌간인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가난하고 굶주리는 고아 형제가 어렵게 맞이한 아내 쪽의 집안으로 쳐들어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 재산을 빼앗는 다. 나나이족에게도 울치족에게도 한 마을을 모조리 몰살하고 먹거리와 재산을 빼앗을 이야기들이 있다. 농경과 정착이 아닌 수렵과 어로, 유목을 택한 이들은 자연이 주는 고통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기에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자연, 특히 동물을 두려워하며 숭배했다. 모든 자연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동물에게는 영혼이 있어 인간의 죽은 혼령이 동물에게 들어간다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동물들 중에서도 몸집이 크고 영리한 동물, 즉 곰과 같은 동물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북유럽의 주술사들이 곰전사들을 축복하는 장면. 곰전사(베르세르크)는 광적인 상태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불굴의 전사를 상징한다.
곰은 큰 몸집과 힘, 때로 뒷발로 일어서서 인간처럼 걷는 포즈, 앞발을 손처럼 사용하는 모습으로 인해 각별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겨울에 죽고 봄에 다시 부활하는 신비함까지 갖추었으니 어찌 영험하지 않을까. 어슬렁거리며 걷는 여유 있는 모습, 새끼에게 극도로 예민한 강한 모성애와 연어를 잡는 영리함도 인간들의 찬탄을 불러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튼튼하고 따뜻한 털가죽과 엄청난 양의 고기, 세간살이와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뼈와 발톱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했을 것이다. 곰은 그처럼 경탄과 탐욕을 동시에 부르는 흔치 않은 영물이었기에 인간들은 고민에 빠졌다. 곰을 먹고 싶고 곰의 모든 것을 갖고 싶은 강렬한 욕망과 영물을 죽임에 따르는 두려움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있는 자연의 대변자, 죽음에서 부활하는 영적 생명체를 함부로 죽이면 자연의 분노를 살 것이고 그 분노는 기근과 한파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약탈하고 몰살하는 극단적 상황까지 내몰릴 것이다. 이런 모순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울치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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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치족의 한 여자가 '숲의 사람'에게 시집가는 꿈을 꾸었다. 처녀는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형제들과 작별, 숲 속으로 갔다.
여자는 숲 속을 떠돌며 먼 곳까지 가서 '숲의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며 그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다 그의 아이 둘을 낳게 되었고, 아이는 곧 곰으로 변했다. 그러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곰과 여자가 살고 있던 곳을 습격하여 남편이었던 곰은 죽게 되고 여자는 아이와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로 온 이후로 새끼 곰 중 한 마리는 죽고 하나만 살아남아 사내아이의 모습으로 다시 탈바꿈했다. 이후 나이가 들어 젊은 청년이 된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 즉 곰이 죽지 않고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꿈속에서 계속 곰과 곰들이 사는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밤에 그를 찾아온 부엉이가 세 개의 호수를 건너고 세 개의 불구덩이를 건너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음을 알려주었기에, 그는 아버지를 찾기로 하고 홀로 마을을 떠났다.
젊은이는 고생 끝에 세 개의 호수를 건넜다. 그리고 마지막 불산을 넘었을 때 그의 뼈와 살이 완전히 바뀌어, 그는 인간의 모습을 벗고 곰이 되어 곰들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곰들의 세계에는 수많은 곰들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던 곰이 젊은이에게 다가와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혔다. 그는 아들에게 숲의 사람들과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을 알려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을 때의 행해야 하는 의례들, 평소의 금기를 지키는 방법들이 가르침의 주요 내용이었다.
다시 마을로 돌아온 젊은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배운 것을 알려주어 지켜야 할 규범을 만들어 주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후 그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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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인간은 자신이 자연에 속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인간,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 지혜를 찾는 인간이 결국 공존의 질서를 찾아낸다. 사람이 비록 자연(곰)을 해쳤지만, 자연은 은혜를 베풀어 인간에게 의례와 규범을 알려주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에벤족과 오로치 족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이야기 속의 곰들은 북유럽의 광기 어린 전사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보다 훨씬 우위에 서서 인간을 지배하는 유일신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 못지않은 영성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을 보호하고 돌보는 이들이었다. 길 잃은 인간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인간과 함께 생명을 낳고 키우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영악했다. 이야기 속에서, 곰은 인간에게 속아 살해되고 곰으로 변신했던 이들도 가족에게 죽임을 당한다.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들어선 고조선에서는 곰이 환웅과 같은 천신의 아래에 위치하며 인간이 되길 소원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현재 공주에 전해지는 곰나루 전설을 보면 곰들의 슬픈 변화가 두드러진다. 암곰은 자신과 같이 살 인간을 구하지 못해 결국 남자 하나를 납치하여 굴에 가둔다. 나갈 때는 언제나 큰 바위로 입구를 막아 남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그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자식을 낳아 곰으로 키우고 있었지만 잠시 방심한 순간, 남자는 도망쳤다. 도망친 남자를 쫓아 고마나루(곰나루)에까지 온 곰은 소리쳐 남자를 불렀으나 남자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배를 탄다. 곰은 남자를 잡기 위해 자신의 새끼 두 마리를 차례로 찢어 죽이는 참극을 벌였지만 기어코 남자는 도망갔다. 절망에 빠진 곰은 그만 금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곰의 혼령은 괴물이 되어 금강을 오가는 배를 뒤집었다. 인간이 다시 의례를 회복하여 곰을 달래는 사당을 짓기 전까지, 재앙은 계속되었다.
공주 고마나루의 곰 설화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보통은 곰이 새끼를 지키는 이야기지만, 다른 버전의 이야기에서는 위와 같이 새끼마저 희생된다.
좀 더 시간이 흘러 퉁구스에 총기가 들어오자 모든 것은 완전히 바뀌었다. 곰들은 대량 살육되었고 신화적 세계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아이누족과 니브흐족이 치유의 힘을 가진 음식으로 귀하게 여겼던 곰의 내장은 ‘미신’이 되었다. 인간들은 살아있는 곰을 우리에 가두고 배에 튜브를 꽂아 쓸개즙을 빨아먹는다. 곰쓸개 웅담 성분의 간장약이 한동안 히트를 친다. 그리고 귀여운 곰 인형, 곰 캐릭터가 등장했다. 자연과 숲의 영혼이며 지배자였던 곰은 이제 앙증맞은 옷을 입고 조금 모자라기도 하고 순박하기도 한 인간의 친구로 거듭났다. 간혹 치유의 힘을 발견한 누군가가 인형을 안고 만지며 고대의 숨겨진 신비함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이제 곰들의 영혼은 물질문명의 깊숙한 곳에 숨어 여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떠도는 곰의 넋은 어디에...
2004년경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신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곰의 특별한 의미를 되살리려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반달곰을 키워 지리산에 방사하고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었다.
그중 한 마리, 방랑하는 곰으로 불리는 떠돌이 ‘오삼이’가 재작년 가을 충청북도 영동군의 민주지산에 나타나 근처 농가의 벌통을 부수어 꿀을 훔쳐 먹었다. 지리산에서 민주지산까지, 그 먼 길을 연결한 백두대간을 타고 방랑의 곰 오삼이는 김천을 거쳐 영동까지 온 것이다. 몇 번이나 포획되었지만 곧 도망쳤고 교통사고까지 당하면서도 계속 탈출했다. 그렇게 인간이 정해준 서식지를 거부한 오삼이는 결국 작년 6월 포획 도중 마취총을 맞은 채 이동하다 탈진, 사망했다.
충청 영동군 민주지산 어귀에서 발견된 오삼이. 곰들의 잃어버린 숲은 회복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오늘 하루에도 많은 동물들을 본다. 그리고 갈등한다. 아파트 앞 광장에서 반려견들과 견주의 관계에 감탄하면서도 그 바로 뒤의 정육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고기를 사 먹는다. 어떤 동물은 가축이 되고 어떤 동물이 가족이 되는지, 그것은 그저 인간이 정하면 되는 것일까. 자연 속에서 마주쳤을 때는 경외와 공포를 자아내는 동물들이 이제 유튜브 영상 속에서 인간에게 재롱을 떨고 있다. 수달과 표범, 사자와 호랑이, 뱀과 악어가 반려동물이 되는 것은 괜찮은가. 굶주리지도 더럽지도 않은 그들이 인간의 돌봄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자연과의 관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