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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Apr 17. 2024

아들을 사랑하는 게 맞냐고 물었다.

정기적인 학부모 모임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다. 아니 이 일이 속상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속상하다기보다 생각이 많았다고 해야겠다. 그날은 한 분이 기분 좋게 쏘겠다고 했다. 첫째 아이가 이번에 K대학에 입학해서 쏘는 거라고. 모든 멤버들은 부러움과 축하를 그분이 흡족해할 만큼 보내드렸다.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딸의 성공적인 대학 입학 때문인지 평소보다 표정이 밝았다. 전교에서 한두 명 갈까 말까 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우리나라 세 손가락에 드는 대학까지 입학했으니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다른 멤버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공부 잘할 수 있냐며 교육비법을 묻기도 했다. 나도 부러웠지만 애써 담담하기로 했다.


한턱 쏘겠다던 그분은 평소보다 맥주도 많이 마시고 모임에 오래 남아 있었다. 둘째 아이가 중2, 모임 멤버들 모두 무섭다는 중2 엄마들이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사춘기라 그러는지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 그들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밤 깊은 줄 모르고 이어졌다.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들의 중간고사에 대한 걱정을 살짝 내비쳤다. 그분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물었다. 학원 왜 안 보내요? 아들이 열다섯이 되는 동안 정말 많이 들은 질문이다. 아들은 지금까지 피아노와 태권도를 잠깐 다닌 것 외에 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그럼에도 별 어려움 없이 학교 공부는 따라갔다. 중학교는 조금 어려워하는 과목도 있지만 내 생각에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아이가 학원에 다니고 싶어 하지 않고, 아이에게 학원이 필요한지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분이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들하고 관계는 괜찮아요?"

나는 잘 지낸다고 했다. 아빠와도 괜찮냐고 확인하듯 묻는 질문에도 당연히 잘 지낸다고, 아빠는 누구보다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어릴 때는 거의 매일 놀아주고 아들과 아빠가 단둘이 여행도 자주 갔다고 말했다. 우리 부부는 모두 아들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사이가 좋냐고요? 진짜 아들을 사랑하는 거 맞아요?"

"네? 당연히 사랑하죠. 진짜 아이랑 사이좋아요."

이렇게 변명하듯 말하고 나는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고 이런 질문에 증명하듯 대답했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졌다. 무슨 의미였을까? 학원을 안 보내는 것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아이와 사이가 나빠서라는 의미였을까?


모임이 끝나고 집에 와서 자려고 누웠는데 구구절절 변명하던 내가 생각나서 화가 났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들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내가 정말 아들을 사랑하나 의문이 들었다. 그럼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에 확신이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분처럼 아이를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에 보내면 모성애를 증명하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자니 정말 내 사랑이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지고, 작은 바람에도 날아가버리는 먼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학력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라고 믿는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는 몇 시간은 안고 재울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했다.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서 혼자 신발을 신는 그 지루한 시간을 응원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힘들 때도 있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끝도 없이 묻는 말에 답해주는 고통을 감내하기도 했다. 이제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한 번씩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욱하는 순간을 눈감아주고 아이가 스스로 마음을 열어 말할 때를 기다려줘야 한다. 나는 최강은 아니지만 최선의 인내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학원에 안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지금도 기다려주고 있다. 남들 다 가는 학원에 안 간다고 해도 스스로 길을 찾고 답을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아이를 학원으로 보내서 남이 가르쳐준 답만 옳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서 참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불안하거나 고통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난 15년 동안 나는 누구보다 불안했다. 학원에 안 보내기 때문에 아이의 현재를, 그리고 아이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학교 생활은 어떤지 항상 듣고 있다. 아이와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책이야기, 친구이야기, 그리고 때로는 아이의 꿈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모르겠다.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목숨보다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분처럼 확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학원을 선택해서 아이를 보내고, 그 결과로 좋은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그래서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다음 주면 아이의 첫 중간고사 기간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공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아들이 이번에는 문제집도 알아서 풀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들도 첫 중간고사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물론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도 정해진 시간 꽉꽉 채워서 즐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원해서 사준 책 틈틈이 읽어준다. 어릴 때부터 신나게 놀다가도 중간중간 휴식처럼 책 읽던 버릇이 남아서인지 공부하다가도 어느 순간 책이 손에 들려있다. 아들은 지금 느린 첫걸음을 떼고 있다. 스스로 시험공부를 준비하고 곧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아들의 성적이 나쁘다고 해도 나는 기다려줄 것이다. 비록 내 마음이 불안하고, 좋은 대학에 보낸 뿌듯함이 마냥 부럽다고 해도 나는 아들을 믿고 기다릴 것이다.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열다섯, 이때가 아니면 스스로 뭔가를 해보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나이는 많지 않다. 지금 넘어지면 금방 일어설 수 있지만 넘어지는 연습조차 하지 않으면 주저앉게 된다. 부족하지만 이것이 내가 아들에게 주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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