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의 위대한 수업 피터 싱어 편을 보았다. 그중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재미있었는데, 여러 가지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기준들이 언급되었다. 우선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도덕적으로 의미 있게 고려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도덕적 지위는 어떻게 부여했는지 보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을 그 기준을 삼았다. 덜 이성적인 존재가 더 이성적인 존재를 위해 있다고 말하며, 야만인보다 그리스인이 더욱 이성적이기에 그들을 노예로 삼는 건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리스인들 중에 (그리스인 입장에서의)야만인보다 덜 이성적인 존재도 있었을 것이며, '이성적'이라는 기준도 모호하다.
그다음 칸트는 자의식과 자기 인식에 기반한 자율성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인간만이 도덕적 지위를 가지고,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경우엔 자의식이 발달하지 않은 사람이나 자의식이 강한 동물의 예가 있기에 이 또한 허점이 있다.
그리고 피터 싱어가 동의했던 벤담은 털이나 꼬리 유무도 아니고, 지적능력이나 언어적 능력이 아닌 고통을 느끼느냐를 기준으로 삼았다. 동물권까지도 도덕적 지위를 넓혔으며 대부분의 생명을 포함한다.
하지만 고통을 기준으로 하면 무통증인 사람에겐 적용되지 않지 않은가? 또한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에 나오는 수준의 ai 로봇이 나온다면?
그렇기에 난 고통보다는 '적극적으로 공감하려는 노력'을 하였을 때 공감 가능한 범위까지가 도덕적 지위/권리의 범위라 생각한다. 공감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적극과 노력이라는 또 다른 주관적 기준을 추가하였기에 그 범위는 제각각 다를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도덕적 지위는 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암묵적으로) 합의된 평균적인 공감의 범위일 것이다. 결국 한 사회의 도덕적 지위의 경계는 항상 모호하고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경계가 정형화되어있지 않고 모호하기에 범위의 변화가 가능하다. 거기에 앞서 말한 '적극적으로 공감하려는 노력'의 동반은 속도가 느릴지언정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모호한 경계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어찌 되었든 당장 공감을 못하더라도 적극적 노력이 지속되는 한 조금씩 공감의 수준은 올라갈 테니 말이다. 우리는 과거엔 씨족 집단 수준만을 공감했고, 지금에 이르러선 민족 더 나아가 문화권 그리고 인류 전체를 넘어 동물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그 경계는 범위가 커진 만큼 더욱 모호하고 경계의 범위 자체도 넓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 범위를 계속 넓혀나가고 있다.
아마 내가 이런 결론을 낸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주요 가치가 자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덕적 지위라는 것도 결국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인간 스스로가 부여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두고, 그 방식마저 능동적인 행태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려는 '노력'의 범위를 도덕적 지위를 부여할 범위로 생각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