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덟 새댁인 내가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한 달에 한 번 도전하는 이 일은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나에게 실패를 안겨주었다. 말 그대로 희망고문이었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임산부만 봐도 눈물이 났다. 저 평범한 행복이 왜 나에게 이토록 특별한 것인지 하늘이 야속했다.
"12개월간 이렇게 열심히 해왔는데 안 된다는 건 조금 더 전문적인 치료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난임 전문 병원에 가셔야 할 것 같네요. 제가 실력 좋은 의사 소개해드릴 테니, 꼭 거기로 가세요."
9시 30분에 병원에 도착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에 앉아있다. 그곳의 차가운 공기는 두리번거리는 눈빛조차 조심스러웠다. 새로운 공간에 가면 여기저기 둘러보기 마련인데 모두가 죄인 마냥 앉아있는 이 새로운 분위기에 나도 동참해본다. 대기실에 앉아 들고 간 가방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는다. 무겁다. 가방 안에 한가득 들어있는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전공서적을 꺼내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내용 따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애꿎은 책장만 넘길 뿐이었다.
"바로 시험관 하시죠." "아.. 그런데 제가.. 지금 일도 하고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요.. 시간을 자유롭게 빼기가 어려워요.. 내년부터 해보고 싶어요." "한시가 급합니다. 그럼 3개월 정도 과배란으로 유도를 한번 해보죠. 주사 한 대 맞고 가시고요. 처방전 드릴 테니 생리 시작 날부터 드세요. 그리고 주사약을 챙겨드릴 건데요. 이거 집에서 직접 놓으셔야 해요. 처방실 앞에서 기다리시면 간호사가 설명해드릴 거예요. "
이 노매 주사는 맞을 때마다 애리다. 아무리 문지르고 또 문질러도 소용이 없다. 주삿바늘 주변은 여지없이 멍들고 뻐근하다. 챙겨주는 주사약을 받아 병원 문을 나선다.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가방이 너무 무겁다. 책 하나를 빼고 올 걸 후회스럽다. 받아 간 주사약은 냉장 보관해야 하는데 출근해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다른 선생님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니까 벼락같이 집으로 달려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주사약을 넣어두고 책 하나를 더 챙겨 후다닥 나온다. 지하철역까지 뛰고 내려서도 뛰어가서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임신을 하려면 몸도 마음도 편하게 해야 한다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퇴근해서도 지하철역으로 뛰어간다. 학교에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쉬지 않고 뛰어야 했다. 무거운 가방 때문에 어깨가 고장 난 것 같다.
"10월 15일 밤 9시에서 12시 사이에 부부관계를 하세요. 그리고 3일 뒤에 만납시다."
"11월 14일 밤 9시쯤 숙제를 하세요.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나오세요. 초음파로 난포가 제대로 터졌는지 확인해볼 거예요."
"12월 15일 밤 10시쯤 숙제하세요.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내원하세요. 그날 봅시다." "난포가 제대로 터졌네요. 잘 자란 난포 4개가 모두 잘 터졌어요. 공 난포가 아니길 바랍니다. 한 2주 뒤에 임신 테스트기 해보시고 두 줄이면 전화 주세요."
임신이고 뭐고 너무 바쁘다. 시험 기간이라 더 정신없다. 발표는 왜 이리 많으며 치료 스케줄을 또 왜 이리 빡빡한지 눈코 뜰 새 없다. 병원에서 내준 숙제를 후다닥 치른 게 다행일 만큼 남편 얼굴을 보기도 어렵다. 3개월 동안 내 배에다 직접 주삿바늘을 꽂으면서 애잔한 나를 위로한다. 멍으로 가득한 엉덩이와 배는 내가 봐도 안쓰럽다. 신랑은 멍든 내 몸을 볼 때마다 속상해한다. 속상해만 하지 말고 주사 좀 놔주라고 괜스레 잔소리를 해본다. 그러면 남편은 주사는 정말 무서워서 못 놓겠다며 좀 봐달라며 날 꼭 안아준다. 이번에도 뭐 안 될 텐데 마음 쓰지 말자며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어차피 다음 달에 시험관 할 건데 기대하지 말자며 무심한 듯 남편을 토닥여본다.
12월 24일, 친척 오빠 결혼식에서 새언니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너무 잘 됐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하는 그들에게 하늘이 큰 축복을 내린 것 같다. 오빠가 너희는 아이를 언제쯤 낳을 생각이냐 물었는데 지금은 바빠 생각이 없다고 대답한다.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딱한 눈빛으로 전하는 위로의 말도 나에겐 필요 없다.
12월 25일, 시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교회에 갔다. 크리스마스라 자리가 부족하다. 가족 모두 뿔뿔이 흩어져 앉았다. 엄마에게 폭 안긴 아가가 세례를 받는다. 어쩜 저렇게 작고 귀여울까. 정말 눈물 나게 귀여운 저 아가의 엄마는 얼마나 행복할까.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아무도 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체 왜 나에게는 아기 천사를 보내주지 않는 거냐며, 대체 내가 뭔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맘고생시키냐며 믿지도 않는 예수한테 따져본다. 모두를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사랑하지 않는 거냐 떼도 써본다.
12월 31일, 테스트기를 해야 하는데 모른 척해본다. 정신없이 출근하고 퇴근 후에 홈 티칭을 하는 아이 집으로 향했다. 12월 31일인 만큼 날씨가 굉장히 춥다.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난데없이 평생 내 돈으로 사 먹어본 적이 없는 순댓국이 당긴다. 다행히 수업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혼밥이라곤 하지 않는 사람인데 용기를 내 순댓국집으로 들어간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살펴본다. 순대만 들어있는 순댓국 한 그릇을 시키고 입었던 패딩을 양쪽 팔만 빼내어 어깨에 걸친다. 절절 끓는 뚝배기에 나온 순댓국이 제법 먹음직스럽다. 청양고추 다진 것을 잔뜩 뿌려 넣고 국물 한입을 먹어본다. 난생처음 혼자 먹어보는 순댓국의 맛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 환상적이었다. 역시 서울에서 제일가는 순댓국 맛집이라 그런가 맛이 좋다. 밥을 말아 앞접시에 덜고 후후 불어가며 음미했더니 어느새 뚝배기를 다 비웠다. 으슬으슬했던 몸이 사르르 녹으며 나의 첫 혼밥이 성공적임에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홈티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너무 피곤하다. 아 올해의 마지막 날도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지나가는구나 하며 2015년 한 해를 되짚어본다. 남부럽지 않게 터진 일복에 대학원 생활에 눈코 뜰 새 없던 한 해였다. 2016년 한 해도 비슷하겠다 생각하며, 운동을 해야겠다 다짐해본다. 작심삼일이지만 새해를 계획해보는 시간은 매해 설렌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집을 정리한다. 오늘도 야근인 남편을 기다리며 소파에 누워본다. 이 노곤 노곤한 기분 딱 좋다. 소파에 누워서 거실장에 넣어둔 테스트기를 째려본다. 저걸 해 말아 백만 번 고민한다. 소변이 마렵다. 저걸 들고 갈까 말까 뚫릴 듯 쳐다보다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테스트기를 호기롭게 꺼내 든다. 화장실까지 열 걸음이면 되는데 발바닥에 껌이 붙었나 다리가 너무 무겁다. 무심한 척 테스트기를 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선반 위에 올려둔다. 손을 닦고 나와 다시 소파에 눕는다. 티브이를 돌려봐도 재밌는 게 하나 없고 시험 시간에 질려서 책도 보기 싫다. 할 일 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데 온 신경은 화장실에 가있다. 어차피 한 줄일 텐데 이건 지독한 희망고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볼까 말까 백만 번 고민하다 몸을 일으켜본다. 화장실로 바로 가면 되는데 괜히 냉장고로 가 물을 꺼내 든다. 냉수 한 잔 들이켜고 화장실 문을 열어본다. 화장실 휴지를 갈아 끼우고 관심 없는 척 선반 위를 바라본다. 이상하다. 모양이 왜 저러지. 한 줄이 아니네. 두 줄이다. 불량이구나. 또 희망고문을 이렇게도 당해보네 투덜거리면서 새 테스트기를 하나 더 꺼내 들었다. 뭐야. 이것도 불량? 아니 설마 임신 아니겠지. 한 번도 두 줄이 나온 적이 없던 난, 이게 바로 매직아이인가 싶다. 나오지 않는 소변을 쥐어짜 내어 2개를 더 해본다. 다 두 줄이다. 몽땅 두 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