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 몸무게가 빠졌다. 커피도 마셨고, 술도 마셨고, 삼시세끼 꼬박 챙겨 먹었는데도 말이다. 어떻게 빠졌느냐 복기해 보면 저녁 혼술을 끊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고작 그걸로. 아무튼 몸무게가 빠지고 나니 건강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글도 쓰지 못했다. 건강이라는 화두로 더 이상 내 안에 글감이라고 할 만한 걸 내뱉을 수 없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든 의문. 나는 정말 건강해지고 싶었을까? 아니면 살을 빼고 싶었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남자 반장을 짝사랑했었다. 내가 본인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굳이 밀어내거나 끌어당기지 않는 성숙한 정신 상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감정에 동요가 없는 모습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반장 부모님들이 학교에 와야 할 일이 생겨 나의 엄마와 (그 당시 나는 여자 반장이었다) 그의 엄마가 수업시간에 교실에 들어올 일이 생겼는데, 나의 엄마를 처음 본 그 친구의 반응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키 161cm에 몸무게 90kg를 육박했던 나의 엄마를 마치 외계인 보듯 봤던 그 아이."돼지다!" 그 단어가 그렇게나 혐오스럽게 쓰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나. 내 눈에 엄마는 그냥 엄마였을 뿐인데, 그 아이의 반응으로 인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부끄러움이 물들어 피부 표면까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는 분명 감정에 동요가 없는 남자라 좋아했던 건데, 내가 잘못 봤구나 싶었다. 그때의 상황, 감정, 기분 하나하나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건 이후 늘 살에 민감하게 살았느냐. 그렇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그냥 살았다. 나에게 엄마의 유전자가 있었으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살이 많이 찐 상태였고 그런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 만났었다. 그렇게 외모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사회생활을 하게 됐고, 점점 나이가 들면서 주변의 말들이 서서히 귀에 들렸다. "누구는 살이 쪄서 늙어 보인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예뻐졌다, 애 낳고 살찌면 끝이다." 뭐 이런 유의 말들이었는데, 이런 말들은 사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들의 눈빛은 그 말보다 더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런 말과 눈빛은 나를, 그냥 사는 사람에서 그렇지 못하는 사람으로 서서히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때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뚱뚱한 사람의 면전에서 "돼지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오히려 부끄러워야 하는 상황. 그때 누군가 나의 부끄러움보다 그 친구의 무례함에 문제시했다면 좋았을 것을. "살 빠졌어? 예뻐 보인다"라는 인사말이 사실은 우리 모두를 몸무게라는 작은 마을에 가둬두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타인의 말과 시선에서 좀 더 자유로울 것. 건강이라는 목표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 여전히 나는 이 말을 곱씹으며 조금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고 적게 의식하고 많이 감각하고. 삶이라는 테두리에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건강을 챙기다가 사유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