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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pr 20. 2021

배부른 일기

오늘은 신청 접수 대에서 근무하는 날이었다. 한 책상에 다른 기관에서 업무지원으로 온 직원분과 딱 붙어서 앉아서 근무해야 하는 날. 출근하여 같이 근무할 직원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어느 때처럼 오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 달에는, 아무리 단기 기간제 근무자라도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이 매너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TMI 후 밀려드는 후회로 몇 주 전부터 말을 아끼고 있다. 별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랬다.


지원나온 직원은 옆에 앉아 있는 내가 몹시 불편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행정 보조원은 세 명으로 이틀에 한 번 씩 접수를 돌아가면서 하다 며칠 전부터 사흘에 한 번 번갈아서 접수를 하고 있는데, 접수업무를 앞둔 전날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정도로 예민하다. 배가 아프거나, 잠을 잘 못 잤거나 하면, 그 하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진다. 내가 근무하는 장소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이고, 아무도 대화라는 걸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옆 자리에서 사탕 포장을 뜯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정도여서 배가 아프면 큰일이다. 그리고 배가 고파도 큰일이다. 내 배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 움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직원분은 내가 유튜브를 보고 있는 걸 봤는지(옆에 바짝 앉아 있으니 못 보면 더 이상한 일이 것이다.) 저기 빈자리에 가서 노트북으로 영상을 봐도 될 것 같다고 했다. 편한 대로 해도 좋다 라며 나를 저쪽 자리로 가도록 유도했다. 멍하니 앉아서 월급 받고 있고, 사흘에  한번 접수를 받는 날인데(고통받는 유일한 날)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아도 되나 싶어, 겸손을 부리려다 생각해보니 이제 2주도 남지 않았는데 눈치를 본 들 얼마나 보겠나.


사실, 아무도 눈치 같은 걸 주지는 않는다. 최근 들어 하루에 신청자는 많아야 20명 적으면 10명대 남짓, 서로 불편하게 붙어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청하러 오면 그때그때 접수처에 가서 잠시 앉아 업무 보조했다. 접수가 끝나면 내 자리로 돌아갔다. 편하게 책을 읽고 눈치 보지 않고 인터넷을 했다. 오늘 신청인은 총 13명이었다.



전 직장에서 정신없이 바빴던 터라 힘들이지 않고 월급을(고작 2개월 단기지만) 받는 것이, 면이 서지 않았다. 그것도 최저임금보다 높게 받으니 말이다. 내 월급을 역사를 톺아보건대 최저임금을 받거나, 실적을 올려 10~20만 원을 더 얹어 받거나 하는 정도의 급여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지원하게 된 희망 일자리에서는 일을 거의 하고 있지 않음에도 최저보다 더 받고 있다.


최근 몇 해 간의 이력은 직장을 다녔다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띄엄띄엄 일을 하며 월급을 받는 생활을 했다. 여기에서 일이 없는 것도 참 힘드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관두지 않고 있는 건, 그럼에도 괜찮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몇 개월 전 어느 회사에서 땀인 지 습기인지 마스크가 축축해질 정도로 힘들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단 5분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정신 바빴고, 스트레스로 호흡이 가빠왔고 민원인의 독설에 하루에도 몇 번이 손이 몸이 덜덜 떨렸던. 화장실에서 심호흡을 하며 내일도 출근할 수 있을까, 아, 10분만 쉬고 싶다고 바라던 그때가 겨우 몇 개월 전이다. 어쩔 수 없었던 건 안다. 그 일은 바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이렇게 일이 없어 허수아비 같다고 투정 부리고 있을 때, 어떤 이는 단 5분의 휴식을 바라 마지않고 있음을 알고있다. 그래서 이런 투정은 그야말로 배부른 투정이다.


이런 행운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 희망 일자리의 모든 업무가 이렇게 한가한  아니라고 한다. 작년에 처음 신청을 받았을 , 인력이 적절히 배치되지 않아 민원이 발생했을 테고, 그래서 이번에는 행정 보조 인원을 넉넉히 채용하게 됐을 . 그런데 예상 밖으로 사람들은 방문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신청을  것이다.


같이 근무하는 직원이 타 기관에서 파견을 돌아가면서 나온 분들과 근무를 하다 보니, 매일같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나와 동일한 업무를 하는 행정 보조 인력 분들과도 말이다.


바쁘지 않아 업무 적으로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보니, 일터는 침묵 그 자체다. 침묵이 지배하는 세상처럼 말이다. 말을 아끼는 게 맞다는 생각을 줄곧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가 침묵하는 일터에 가보니, 오랫동안 가졌던 생각에 균열이 생겼다. 다음에는 조금이라도 소통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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