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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Nov 29. 2022

너의 안부를 묻는 밤

H야, 잘 지내니?

 

언제가 우리는 마흔이 되면 삶이 여유로워지고, 지혜를 가진 어른이 될 거라 생각했었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서른아홉 살이 지나갔고 다음에 마흔 살이 된 거야. 이제 밖에서 우리는 마흔으로써 대접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은 우리를 마흔 살 역할에 대한 기대를 갖겠지.


H야, 난 말이야. 느긋하고 괴롭고, 또 느긋하고, 괴롭고, 변화무쌍한 감정을 다스리며 지내. 엉망진창 같기도 하면서 이 같은 날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 여전히 나는 위태로운 사십 살 인간이야.


여전히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고, 잠을 잘 못 자고 있어. 잠들기 직전이 가장 두렵고. 나에게 미래가 무섭지 않은 날이 있을까.. 아직은 40대라서 이렇게 지내는 게 그럭저럭 견딜 만 해. 신체 내부는 급속도로 노화를 겪고 있지만 외적으로 아직 젊어 보여서 인지, 옷을 잘 챙겨있고 적당히 꾸미고 거울을 보면 아직 쓸만하네, 라며 흐뭇한 표정을 짓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알잖아. 시간은 나 보다 언제나 빠르다는 걸. 40살도 한 달 남았잖아. 내년이 다가오고 있어...


최근에 나는 유익하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집에서 영어 필사를 해보기도 하고, 유튜브로 코딩 강의를 듣고, 그리고 돈 공부를 시작하고. 이런저런 나의 가능성을 엿봤지. 그렇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얼렁뚱땅 가을이 지나갔어. 그리고 돈 공부를 하면서 주식을 시작했어. 주식을 하면서 일상에 조금 재미가 붙었는데, 그게 도박에 빠진 기분이 들어서 침울해졌어. 하루 종일 차트를 눈에서 떼지 못하는 거야. 몇 만 원도 아니고 몇 천 원을 잃었을 때, 불안해서 잽싸게 팔기도 했어. 이게 뭐 하는 거지 싶은 거야. 여전히 하루 중 몇 번은, 아니 사실 많은 시간을 주식 차트를 보며 지내. 설마 주식으로 일확천금을 바라고 있는 걸까..


하하하... 실은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야. 나는 어떤 대단한 행운을 바라고 있어.


지금의 인생을 단 번에 빠져나갈 수 있는 대단하고 엄청난 행운을. 나, 여전하지?


H야, 많이 보고 싶다.  


오늘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어. 이런 꿉꿉한 날에 수영장까지 걸어가기로 한 거야. 수영장에 도착했을 때 온몸이 뜨거운 거야.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어. 땀이 나는 거야. 그리고는 씩씩해진 기분이 들었어. 아, 이런 기분이면 앞으로 잘 살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어. 코로나에 걸려서 몇 주 동안 하지  못했던 수영을 원 없이 했고, 밤에는 아쉽게 졌지만 치킨을 먹으며 동생과 축구를 봤어.


그러고 보니 너와 월드컵을 봤던 기억이 나. K와 역삼동에 있는 커다란 티브이가 있던 맥주 가게였어. 월드컵이 아니었던가? 정작 그게 월드컵이었는지, 축구 경기가 나오는 술집이었던 건지는 기억이 안 나네. 네가 그날, 우리의 만남을 싸이월드에 남긴 글이 너무 사랑스럽고 예뻤는데. 우리 세 여자의 이야기를 너무 잘 표현했어 감동이었지. 그때 우리 참 젊었는데. 그런데 늙은 척했던 거 기억나? 세상 다 산 것처럼 인생이 왜 이러냐며 투덜댔어. 맥주 집에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고 캬~를 내지르며. 고등학생이었던 우리가 그대로 20대가 되어 술집에 아무렇지 않게 가는 게 좀 웃겼어. 우리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어서 인지, 너와 술집에 가면 어른 흉내를 내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 교복 입은 너의 모습이 여전히 선하거든. 사실 얼굴도 그대로라는 거 알고 있어? 너도 나를 볼 때 그렇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쓸쓸했던 마음에 행복감이 들어와. 아, 그런데 눈물이 날 것 같냐, 갱년기도 아닌데...


전에 네가 우리 집에서 음악 캠프 보다가 울고 그랬잖아. 드라마 보다가 울고, 괜히 눈물 흘리고. 요즘 내가 그래. 행복한 상황에서도 눈물이 나고, 어떤 걸 보다가, 길을 걷다가 눈물을 흘리곤 해. 그럴 때마다 그때의 네가 생각나. 너의 마음이 그냥 조금 알 것 같았어. 아, 그때 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해. 10년이 넘어서야 그 마음을 이해했어. 아니, 사실은 더 일찍 이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고, 꽤 오랫동안 서서히 멀어지기로 결심했을 테니까.


세상이, 사는 게 유난히 어렵고 힘들었던, 우리들의 삼십 대를 기억해. 우린 점점 힘듦을 말하기를 꺼려했지. 너도 나도 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아. 우리는 그걸 넘어가야만 했으니까. 말로는 풀 수 없는 어려운 숙제처럼. 말을 하면 시시해졌어. 그렇지만 그건 전혀 시시한 게 아니었거든. 헤어지고 돌아가면 시시한 그 말이 숨이 막혔어. 어쩌면 삼십 대에는 혼자 넘어야 하는 그런 길이 있었을지도 몰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조심스럽고 그 어느 때보다 말을 아꼈어.


사는 게 참 오묘해. 죽을 것 같은 나날이 과거가 되고,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고. 이 행운이 금세 달아날까 걱정을 하고. 살 얼음 판을 슬쩍슬쩍 걷고 있는 기분에 움츠러들기도 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뒤를 돌아 내 방을 둘러봤어. 아, 오늘 나는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는 걸 깨달았어. 든든한 지붕이 아래 안락한 내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잖아. 언제가 겨울은 너무 매섭고 추웠고 두려웠는데 말이야. 그 겨울을 견뎌내었기에 지금의 소중함을 알게 된 걸지도 몰라.


H야, 난 좀 달라졌어. 자존심을 굽힐 줄도 알고,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 됐어. 일하던 곳에서 계약 기간이 연장이 됐고, 예상보다 더 길게 편한 일을 해서 돈을 모을 수 있었어. 제법 어른이 된 건가. 좋은 분들을 만났고 존중을 받으며 일했어.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걸. 힘든 길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배웠어. 어릴 땐 잘 몰랐어. 버티지 못한 나를 너무 미워했잖아, 왜 난 버티지 못한 걸까, 라며 한탄하고, 너를 괴롭히고,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그곳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야. 우린 그때 몰랐잖아. 밥벌이를 위해 세상에 기웃거리다 보니 이렇게 생긴 곳, 저렇게 생긴 곳이 있다는 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더 좋은 곳이 있다는 걸 말이야.


H야, 너의 마흔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니? 그리고 요즘 어떤 걸 마음에 담고 있니? 네 얘기를 듣고 싶은 밤이다.


언제 역삼동에 맥주 마시러 가자. K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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