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줄 알았던 옛날 카메라. 동작을 하는지 궁금하여 AA 건전지를 넣은 뒤 전원 버튼을 눌러본다. 작동하는 카메라. 카메라 안에 들어 있던 사진 몇 장.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던 옛날 풍경을 바라본다. 사진을 찍었던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시 보니 세월이 훌쩍 지나있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진을 찍었던 때의 날씨는 선명히 기억한다. 찬바람에 코끝이 얼얼했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시골 민둥산 위로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 사진을 남겼다. 집들과 나무 몇 그루 빼면 휑한 모습의 시골 풍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지 얼마 안 된 디지털카메라를 게시하고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호기심이 넘치던 시절. 연거푸 입김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고 동산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지금의 나라면 휑한 풍경을 보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겼을 것이다. ‘무엇이 그리도 신기했었을까.’ 그러한 생각이 들자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형용할 수 없는 진한 씁쓸함이 몰려왔다. ‘그 당시에는 저러한 풍경을 보아도 삭막하다고 느끼진 않았을 텐데.‘ 어른이 된 지금은 파란 하늘 대신 텅 빈 산의 모습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과거의 내가 지금 나의 모습을 본다면 많이 의아해할 것 같다.
사진: 한 율(코레아트)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고 기억은 물이 빠지듯 머릿속을 빠져나가고.
초여름 물이 빠지는 갯벌. 썰물 무렵, 육지에서 가까운 곳부터 천천히 바닥을 드러내는 바닷가.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는 어느 순간 넓은 갯벌로 변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멀어져 가는 기억들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빠져나간다. 마치 엊그제 일처럼 선명했던 기억도 점차 희미해지다 까맣게 잊힌다.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다면 사진 속 장소를 갔다는 기억도 영영 잊고 지냈을 것이다.
쏜살같이 움직이는 작은 게, 망둥어, 갯가재 등을 따라잡으려 진흙을 튀기며 갯벌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던 기억. 빨리 나아가려 할수록 발이 푹푹 빠졌던 갯벌. 여름철 따가운 햇볕에 팔과 다리는 이미 불그스름하게 그을렸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쳐다보니 뭉게구름이 느리게 떠다니고 있었다. 시간 또한 느릿느릿 흘러간다고 느꼈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당연히 꿈꾸던 것을 이루고 보다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다.
사진: 한 율(코레아트)
배에 돛을 단 듯이 흘러가는 시간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렸을 때의 기억은 희미해진다. 망각으로 인해 구멍이 송송 뚫린 기억의 타임라인.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던 어린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까마득한 미래는 어느새 과거가 되었다.
밀물 무렵, 사진: 한 율(코레아트)
때가 되면 다시 차오르는 물
기억의 저편 너머로 저물어가는 수많은 순간들.
과거에 설정해 두었던 인생의 항로를 따라 순탄하게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가.
소중한 지도를 잃어버린 채로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 한 율(코레아트)
마음속에 일렁이는 파도
흐린 날씨.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홀로 서 있었다. 눈앞을 가로질러 유유히 비행하는 갈매기.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코 끝에 내려앉았다. 수분은 머금은 모래를 밟으며 걷다가 발견한 소라고동. 빈 소라고동 껍질을 귀에 가져다 대자, 쏴아아- 귓가에 파도소리가 들렸다. 꿈과 확신에 가득 차 있었던 시기. 흐린 바닷가 풍경은 스산하거나 을씨년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소라고동을 귀에 가져다 댄 채로 한참 동안 파도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원대한 목표에 반드시 도달하리라.’
당찬 포부를 머금고 해안선 끝에 걸친 먼 섬을 쏘아본다. 파도에 따라 일렁이는 듯한 작은 섬.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지 쉽사리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처럼 막연해 보이는 듯한 큰 목표. 하지만 먼 훗날 이를 반드시 이루리라 다짐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마지막 사진을 보며 자문한다 ‘그 목표에 도달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