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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다 Apr 01. 2024

소설 - 망각의 시간 속에서

(1부) 1.



1

     

사람들은 종종 시간이 멈추면 어떨지 생각한다. 아마 쉬고 싶거나 지나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탓이겠지. 하지만 시간이 멈추는 건 아주 흥미롭지 않다. 나는 종종 시간이 다시 흐르면 어떨지 생각한다.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사람들의 다음 발이 움직이고, 차가 경적을 울린다. 날갯짓을 멈춘 새들이 날고, 멈춘 구름이 떠다니고 한 폭의 그림 같은 세상이 움직인다. 하지만 그건 그저 상상이다. 모든 것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머무른다. 

     하루일과는 냉장고에서 빵을 집어 먹는 행위로 시작된다. 지루하기 짝에 없다. 하루 중 가장 지루하지 않은 건 책을 읽는 시간이다. 빵과 함께 시작된 독서는 점심까지 계속된다. 종종 마음을 울리는 구간에서 잠시 책을 덮어두고 사색한다. 내가 이 책의 인물이라면, 같은 경험을 했다면 무슨 선택을 할지, 혹여 내 삶에서도 그런 비슷한 경험은 없었는지, 그게 언제였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떠올리다가, 어쩌다 시간이 멈춰버렸고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못내 가슴이 시큰해져 다시 책장을 열고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삶도 이처럼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흐른다는 건 큰 행운이라는 생각과 함께 또다시 사색과 후회 섞인 한탄을 반복한다.

     오후 두 시쯤 밥을 먹으러 몇몇 식당에서 기대 찬 사람들의 막 나온 음식을 뺐어먹는다. 음식 서리는 원하는 만큼 한다. 가끔은 음식 전체를, 가끔은 이 식당 저 식당을 전전하며 한 두 입 씩 뺐어먹는다. 

     다 채운 배를 끌고 가는 곳은 늘 같다. 공원이다. 늘 그렇듯 푸들에게 끌려가는 남산만한 남자가 공원 초입에 익살스럽게 멈춰있다. 차례로 손을 잡은 커플, 근교로 산책 나온 티를 폴폴 내는 가족을 지나치면 커피를 들고 풀밭에 선 중년남자가 보인다. 남자는 풀밭너머 운동장 허공에 뜬 농구공을 바라본다. 10살짜리 남자아이가 던진 농구공이 뒤로 벤치가 늘어져있다. 나는 남자와 아이를 지나 벤치로 간다. 아마 저 아이는 아저씨의 아들일 거야. 먼지 내린 공간에 가구들처럼 사람들은 늘 있던 장소에 늘 있던 자세로 존재할 뿐이다.

     가장 좋아하는 풍경은 이 노인의 등. 이 등은 어딘가 외할아버지를 닮았다. 어딘가에 오래 박힌 돌 같은 그 넓고 포근한 등은 움직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마치 외할아버지의 등처럼. 서너 살쯤 된 아이 앞에 마주 앉은 이 노인 옆에는 중년 남자가 있다. 둘 다 부자사이를 자랑하듯 검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는데 둘이 보이는 태도는 흥미롭게 다르다. 우선 노인은 앉아있는데 중년남자는 서 있다. 아마 나이 나이 마흔 넘어 낳은 늦둥이 아들을 사랑도 하지만 그 때문에 걱정도 근심도 많은 탓일까. 나이가 들수록 걱정도 많아진다고들 하니까. 그에 비해 노인의 얼굴은 평온하다. 나는 두 남자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노래를 튼 뒤 한참 동안 그 노인의 등을 바라본다.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프다는 소식 때문에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찾은 병원이었다. 쭈뼛거리며 들어온 나에게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손녀 왔으니 맛있는 곳에 가야 한댔다. 그래서 우리는 소문난 병원 식당으로 향했다. 할머니는 어떤 음식이 먹어도 되고 안 되는지 잔소리와 함께 늘어놓았다. 먹기 좋은 크기로 가위질하는 할머니 반대편에서 나는 갈비탕에 담긴 갈비를 건져 먹었다. 그 순간 뭐랄까 굉장히 평온했다. 뭐랄까. 작은 소속감 같은 걸 느꼈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 곤란한 상황이면 언제는 내가 손을 뻗을 수 있는 거리감. 세세한 행동까지 제약당하지 않는 너와 사이를 자유롭게 채운 친밀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 문득 노인의 등을 보다 보면 그 공간, 거리, 친밀감이 떠오른다. 덕분에 무디고 지루한 하루가 조금 위로가 된다. 

     하지만 그건 순간이었고, 순간이어서 좋은 거였어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밥을 먹으러 간다. 편의점 서리를 하고 집에 가면 손목시계가 아홉 시를 가리킨다. 잠에 들 준비가 됐는데도 밖이 여전히 해는 붉은 채로 지지 않았다. 나는 노을빛이 한 줌도 들어오지 못하게 창을 여미고 침대에 누워 못다 본 영상을 찾아 틀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겨우 지나가는구나.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아직 삼일. 


     - 목요일까지 아직도 삼일이나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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