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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말야 Oct 30. 2022

책을 훔치거나 사지 않고 읽는 법

지역 도서관에서 꽤 유명한 시인의 강연이 있어 방문했다. 시인은 프로필 사진 만큼이나 젊어보였고, 이른 나이에 등단한 만큼 등단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은 작가의 기세라 강연 역시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처음 본 시인의 강연도 물론 나에게 아주 유익하고 건강한 인풋이었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오랜만에 찾은 공공도서관의 풍경이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 전혀 딴판이라서 충격인 것이 아니었다. 발길을 끊은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 여전히 이전과 같다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심지어 그곳은 내가 사는 동네의 그것이 아니고 (거의) 처음 와본 동네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서관에 발길을 끊은 것은 고의는 아니었다. 학생 시절에는 곧잘 걸어다녔던 2.7km가 더이상 걷기에 부담스러워진 것(버스를 타도 이래저래 효율적이지 못하다)과 소비 사회에서 살아가며 주머니에 푼돈이 들어오기 시작함이 그 이유였다. 한마디로 게으르고 돈 쓰기에 헤퍼졌다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찾는 일이 줄어들자 내 안에서 '책은 사보는 것'이라는 명제가 생겨났고 서점은 가도 도서관은 가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유일하게 사회적 관계에서 밝힐 수 있는 취미) 부끄럽게도 공공도서관을 근 몇 년동안 찾은 적이, 심지어 대출을 한 적도 없다는 것이 오늘 다른 동네의 공공도서관을 몇 년만에 방문하고나서야 깨달은 발견이었다.

위에서는 도서관이 기억 속의 그것과 완전히 같다고 했지만 사실 도서관은 많이 발전되어 있었다. 이전보다 책을 더욱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인테리어 되어있었고, 분위기는 밝고 따뜻했으며, 큐레이팅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 역시 그러했다.
도서관과 같은 공공시설은 취약계층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특히 소속된 곳(가정이나 학교)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이/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으로서 지역 사회에 필수적이라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곳은 공공시설이라는 정체성답게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은 물론,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도 (비청소년은 시간에 따라 출입불가) 마련되어 있어, 지역사회를 살아가는 청소년이었던 사람으로서 마음이 든든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책장을 가득채운 장서가 주는 아늑함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아늑함은 새 책만이 주목받는 서점과는 다르게 시간이 켜켜이 쌓임으로써 만들어진 물적, 심적 아늑함이었다. 또, 중간중간 자리한 책상에서 저마다 치열하게 지식을 습득하고 능숙을 훈련하는 많은 학습자들의 모습이 '나는 왜 더 부지런하게 공부하지 않는가'하는 죄책감을 (일시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도 10대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서 소중함이 더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책을 소유하는 방법이 서점에서 그것을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10대 시절, 언젠가 도서관에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수험생들 사이에서 중간고사를 앞두고도 유유자적한 척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에어컨 바로 옆자리라 오히려 바람이 오지 않아 조금은 더웠던, 반바지를 입은 맨다리가 가죽소파에 쩍쩍 달라붙었던 감각을 기억한다. 다리를 대고 있었던 자리는 금방 체온만큼 따뜻해져서 다리를 이리저리 옮겼다. 얼마나 많은 지역주민들이 그곳에 앉아 다리를 이리저리 옮기며 책을 읽었을까. 내 기억 속 도서관은 체온만큼 따뜻한 곳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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