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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정원 일기

고마워요, 사랑해요!

by 일곱째별


27년 전 <아주 오래된 연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다음 해 정원 없는 정원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정원 있는 정원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정원 없는 정원을 나왔다.

그리고는 길을 걸었다.

하염없이 걸었다.

정원을 찾기 위해서.


잘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기도 하고

노선이 다른 차를 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혼자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을 때도 계속 걸었다.

정원을 찾아서.


꼬마 정읍댁으로 요양보호사를 하기도 하고, 곡성 강빛마을에서 한달살이를 하기도 하고, 원주와 해남과 담양에서 입주작가로 있기도 했다. 겸임교수로 며칠이나 몇 주씩 남의 집살이를 하기도 했다.


잠시 돌아온 정원 없는 정원은 여전히 안전하고 풍요롭고 따스했다.

거창한 정원은 없어도 몬스테라와 접란과 뱅갈 고무나무가 있었다.

무엇보다 변치 않는 사랑과 신뢰로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동안 정원 없는 정원에서 삶과 더불어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논문을 썼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책을 했으며 영어 회화와 에어로빅과 밸리댄스와 탱고와 수영을 배우고 사진도 배웠다.

마지막으로 SCA(Specialty Coffee Association) 바리스타 파운데이션 과정을 배웠다.


어딘가 정착하면 작은 공방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마음 맞는 이와 소모임을 하며 커피를 마실 꿈이 있었다. 첫 책도 준비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 주말마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카푸치노를 만들었다.


고목처럼 짙은 갈색 에스프레소에 웨딩드레스처럼 하얀 우유 거품으로 첫 카푸치노 하트를 만든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알콩달콩 설레던 가슴이 불안하게 뛰던 심장 박동 끝에 두려움으로 얼어붙으며 싸늘한 통증이 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자 깨진 것은 꿈이 아니라 허상임을 깨달았다. 나란히 잠들어도 같은 꿈을 꿀 수 없듯이 소망의 다른 이름인 꿈은 누구와도 함께 꿀 수 없었다. 하물며 오랜 세월 혼자만의 상상을 펼치던 정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동안 찾아 헤매던 정원은 영화 <판의 미로>처럼 암담한 현실을 잊기 위한 일종의 꿈이었던가. 그렇다면 손잡고 하는 산책도 커플룩과 커플 자전거도 모두 오필리아의 상상일 뿐이었던가.


제아무리 하얗고 고운 거품을 덮어씌운다 해도 에스프레소는 감당 못 할 만큼 썼다. 그러니 그 달큼한 거품조차 없다면 어떻게 에스프레소를 마실 것인가. 정원을 찾는 꿈마저 없었다면 지난 3년 여의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터.


일머리가 없어 유달리 행동이 굼뜨고, 결정적으로 카페인에 취약하면 바리스타가 되기 어렵다는 걸 커피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꿈은 이루는 과정에서 비로소 난관이 있음을 체득한다. 인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지만, 빈번하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이제 그 집착을 내려놓는다.



커피 바리스타 SCA 국제자격증 취득 필기와 실기 시험을 무사히 치른 다음 날, 정원 없는 정원을 떠난다.


정원 없는 정원에서 사랑을 배웠다.

책임지는 사랑, 아껴주는 사랑, 챙겨주는 사랑, 믿어주는 사랑, 오래 참는 사랑, 존중하는 사랑, 허용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 이해하는 사랑, 인정하는 사랑,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 떳떳하고 당당한 사랑, 정직한 사랑,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상대가 원하는 걸 해 주는 사랑, 잡고 싶어도 떠나보내주는 사랑,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그리고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지극한 사랑.


무한한 고마움을 안고 그 정원을 떠난다.

안녕, 내 아주 오래된 사랑하는 정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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