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다, 재밌다 해서 봤는데 정말 재밌네요
며칠 전, 영화 '체인소맨-레제 편'을 보고왔다. 연말이 다가오는데 아직 못 쓴 통신사 영화쿠폰이 문득 떠올랐고, 얼마 전 친구가 체인소맨을 너무 재미있게 봤다고 말한 게 생각났고, 찾아보니 관람평도 매우 좋기에 냅다 예매했다. 사실 애니를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큰 기대는 없었지만, 다들 열광하는 이유가 몹시도 궁금했다. 입장할 때만 해도 약간 졸린 상태라서 꿀잠을 자는 것이 아닐까 우려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한순간도 졸지않고 집중해서 봤다! 원작 내용을 찾아보지 않고 백지 상태로 갔기에 디테일한 내용에 대한 이해도는 낮지만, 이 영화가 이토록 관객들과 나를 사로잡은 비결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간단히 끄적여보고자 한다.
한줄평은, "레제는 덴지를 유혹하고, 나도 유혹했다."
1. 유혹당한 덴지
주인공 덴지(체인소맨)의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레제에게 홀딱 빠져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데에 3초면 충분하다고 했던가. 둘의 첫 만남인 공중전화 부스에서 꽃을 받고 배시시 웃는 레제를 마주한 순간, 덴지는 분명 반했다. 이 때 레제의 미소는 마냥 해맑다기보다 어딘가 묘한 인상을 주는데, 그럼에도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영락없는 소녀의 그것이다. 아무튼 이 씬을 보자마자 작가가 레제 캐디를 영혼을 갈아넣어서 했구나, 싶으면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반은 깨달아버렸달까.
또한 레제는 데블헌터로서만 살던 덴지를 밤의 학교에 데려가고, 수영을 알려주고, 축제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하며 그가 놓치고 살던 그 나잇대의 소소한 경험들을 채워준다. 상대방의 삶에서 충족되지 못한 무언가를 비춰주고 그로 인한 결핍을 채워주는 것은 사람의 무의식을 사로잡는 고전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로버트 그린은 "유혹가들은 상대의 삶에서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지 파악해 그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했는데, 레제 또한 덴지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며 그를 파고든다.
나아가 함께 간 축제에서 피날레로 불꽃놀이를 감상하며, 극적인 광경 아래에서 레제는 덴지에게 본인과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 대사도 꽤나 인상적인데, 본인이 덴지를 '지켜주겠다'고 한다.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온 체인소맨을 역으로 구원해주겠다니! 상대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으로 모자라 구원자를 자처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유혹이 정점을 찍는다고 느꼈다. 하지만 덴지는 도피의 제안을 거절하고, 실패한 유혹가가 곧 전략을 대담하게 바꿈으로써 덴지도, 관객도 순식간에 배신당한다.
2. 유혹당한 관객(또는 나)
한편, 관객들은 덴지에게 이입함으로써 레제에게 반하는 동시에 관찰자적 시점에서 또 한번 매료된다. 밤의 학교에서 레제는 혼자 화장실에 다녀오다 악마와 마주친다. 여느 약한 소녀처럼 겁에 질린 채 옥상까지 도망치는데, 악마에게 공격당하는 바로 그 순간 덴지가 구해주리라는 나의 예상을 뒤엎고 그녀는 악마를 제압해 태연한 얼굴로 목을 조른다. 악마의 힘이 빠질 때까지 무심한 얼굴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에 혼란스러웠지만, 캐릭터에 대한 궁금증은 배가 되었다. 아니 레제 너 뭘먹고 힘이 그렇게 쎄니
게다가 이후 악마로써 정체를 밝힌 채 데블헌터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장면에서도 레제는 마냥 괴기스러운 외형을 하지 않는다. 얼굴은 아예 바뀌지만, 그럼에도 달콤한 목소리와 여성의 신체는 그대로이다. 심지어 윗가슴과 다리를 거의 드러내고 신체의 일부만 아슬하게 가린 복장이 주는 관능미로 인해 덴지를 매혹하던 레제와의 동일성이 단절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영장씬보다 더욱 강조되는 육체미와 여유 있는 손짓, 그리고 "붐", 한 마디로 일대를 불바다로 만드는 강자로서의 면모가 혼재되어 악마이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성을 유지한다.
동시에 레제의 존재감 외에도 이 영화에는 사람이 본능적으로 긴장해 몰입하게 되는 요소들이 많다. 피바다가 마그마처럼 쏟아내리는 장면, 꽤나 잔인한 대사들이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상상들, 태풍의 신이 바친 피에 뒤덮인 레제, 윙윙거리는 전기톱 소리, 신체의 일부가 수시로 절단되는 등장인물들...이 모든 위협적인 자극들은 사람을 각성시킨다. 인간은 흥미롭거나 두려울 때 집중하는 법인데, 이 영화는 두 감정 모두를 미묘하게 엮어 자극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눈동자를 확대해 그에 비친 장면을 보여주는 씬이 많았다. 그냥 연출의 일부인지 심리적 의도가 있는지 알 순 없지만, 개인적으로 이 또한 관객을 무의식적으로 각성시키는 요소라고 느꼈다. 두려움을 느낄 때 사람의 동공은 확대되는데, 이는 투쟁-도피 반응(Fight-or-Flight Response)의 일종이다. 그리고 우리의 교감 신경은 긴장되는 시, 청각적 자극을 통해 직접 각성되기도 하지만 위험을 감지한 타인의 반응에 의해 자극되기도 한다. 한껏 확대된 눈동자에 비친 장면들이 연출적 효과와 더불어 관객의 동공까지 커지게 하는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봤다.
그리고 결투 씬으로 돌아가보자면, 기나긴 접전 끝에 덴지는 체인을 이용해 레제와 함께 묶인채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한때 서로를 구원하리라 믿었던 둘이 서로의 무게에 의해 옴싹달싹 하지 못하고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역설이 수영장 씬과 교차되며 씁쓸한 감각이 혀에 맴돌았다.
3. 엔딩
레제는 마지막 순간 덴지가 기다리는 카페로 향하지만, 결국 그에게 닿지 못하고 마키마에 의해 죽는다. 그토록 강했던 레제가 너무 허무하게 죽어서 당황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찾아보니 마키마는 이 세계관에서 상당히 강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한 설정상 마키마가 레제를 제거한 것이겠지만, 마음을 뺏긴 히어로가 차마 죽이지 못한 악당을 같은 여성, 그것도 덴지가 마음에 품은 또 다른 여성이 처치하는 장면은 어쩐지 '연적 간의 제거'라는 클리셰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레제가 고아로써 소련의 실험실에서 육성된 모르모트임이 밝혀졌다. 초커의 핀을 쇽 뽑으며 파괴적인 폭발을 일으키던, 가공할 만한 위력이 이해되는 설정이다.
죽어가는 와중에 카페에서 기다리는 덴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레제는 읊조린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이 맞다면 아래와 같은 대사였다.
나는 왜 너를 처음 만났던 순간에 죽이지 않았을까?
...사실 덴지, 나도 학교에 가본적이 없어.
결국 '고작 16살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잔인한 전투에 동원되는' 덴지를 몹시도 안쓰러워하던 레제는 그 본인이 같은 결핍을 가졌던 셈이다. 덴지를 향한 동정과 도피의 제안이 처음에는 애정으로, 이후에는 목표 달성의 수단으로 생각되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녀 스스로에게 하는 말로 이해되었다. 레제의 사랑은 덴지를 향한 연심과 체인소맨에 투영된 본인에 대한 연민이 복잡하게 뒤섞이지 않았을까. 이처럼 엔딩에서는 정체를, 그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로써 영화 내내 관객을 궁금하게 한 레제에 대한 마지막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며 여운을 선사한다.
관객을 매료하는 압도적인 캐릭터성과 그 매력을 뒷받침하는 훌륭한 작화, 지루함을 느끼기 힘든 연출과 엉덩이가 아프지 않은 적당한 러닝타임까지,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의 관람이었다.
인간은 상반된 것이 공존할 때 호기심과 매력을 느낀다. 수줍고 맑은 소녀와 강력한 폭탄의 악마가 공존하는 레제, 그리고 여느 히어로와 악당과 같이 서로를 죽일 듯 싸우는 전투 씬과 둘의 미묘하고 애틋한 애정 씬 간의 갭이 관객을 완벽히 사로잡았다고 느낀다. (특히 영화가 끝나고 나서 유튜브로 뮤비 Iris Out과 Jane Doe를 보며 이 감정을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못 본 분이 있다면 바로 들어보시길!)
Jane Doe의 의미를 검색해본다면 아마 여운이 배가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