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눈은 참 신기하다. 태어난 바다를 잊지 않고 물기를 머금고 있는 것, 살아가는 땅처럼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는 것, 우린 같은 것을 같게 볼 수 없다는 것 등등 많은 것이 신기하다. 그리고 비행기를 탄 후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 하늘을 날도록 진화하지 않은 날개 없는 호모사피엔스 종의 시각 유전정보 어딘가에 이런 일을 겪을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렇게 엄청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그냥 실내에서 밖을 보는 활동과 다를 바 없기는 하지만.
우리가 몽골을 방문하는 기간에는 비가 예고되어 있었다. 날씨가 흐리니 밤하늘에 별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과 걱정이 들었다.그렇지만 우연히 옆에 앉은 몽골 사람은 몽골은 비가 와도 별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 근무하다 잠깐 몽골에 휴가를 낸 그 사람은, 몽골의 비는 일본과 다르단다.
일기예보가 틀릴 순 없는지 비행기 창 밖에는 두꺼운 구름이 깔려 있었고 풍경은 언뜻언뜻 토양과 녹색이 비추다 말다 했다. 풍경이 보일 때 그 사람은 저기 게르가 있다고 알려주었지만 하늘 높은 곳에서 풍경은 바라볼 수는 있어도 게르는 볼 수 없는 내 눈은 뭐가 게르고 뭐가 그냥 초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칭기즈칸 공항에서 울란바토르를 가는 길에서
마침내 칭기즈칸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게이트를 나섰다. 무척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지만 초원은 그깟 차량에 가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초원은 거침이 없었다. 차를 타고 울란바토르까지 가는 길에는 아무 건물이 없었다. 그러나 고작 인간이 만든 건물 몇 개가 없다고 이 땅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곳은 분명 발 붙이고 서 있을 수 있는 한낮의 대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맑은 대낮에 폭풍우가 치는 바다 위에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초원은 그런 기분들이 가득했다.
신기루 같았던 울란바타르 도시
울란바타르는 초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중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차로 한참을 달려도 도시의 가장자리에도 닿지 못했다. 사막의 신기루를 보면 그런 느낌일까? 초원에서의 거리감각은 평생 눈앞 30cm 거리의 사물을 집중해서 보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기이하게 느껴졌다. 무척 멀리 있는 대상이 시야에 잡히는 일은 낯선 경험이었다. 눈에 보여도 당장 닿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시내는 차량이 매우 혼잡하여, 마침내 도시에 진입한 이후에도 한참을 뭉그적거리다가 겨우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4시간이나 걸렸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에 홉스골로 가기 위해 울란바토르에서 무릉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는데, 이미 인천공항에서 출입국심사 때문에 난리를 겪은 탓에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내일 새벽 일찍, 비행기 타기 5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숙소 사장님은 아침에는 칭기즈칸 공항까지 2시간이면 된다고 하셨다. 몽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아침에는 시내가 텅텅 비어 있을 거란다.
아무리 그래도 거리가 있는데 그게 가능할까 싶어 믿어도 되냐고 물으니 진짜 인생에 필요한 말을 해 준다며 부모님도 자식도 아내도 믿지 말고 오직 너 자신만을 믿어야 한단다. 참고로 몽골은 제국시절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 나라로, 현재도 불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 이상이다. 비행기에서 만난 몽골사람은 울란바토르 근처에 부처의 이름을 한 산이 있고 몽골에는 불교 신자가 90퍼센트 이상이라고 했다. 여하튼 그래서일까 근심걱정에 휩싸인 중생에게 불교 명언이 걸어 들어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육조 혜능선사께서 금강경 한 구절로 진리를 깨달았던 것과 같은 경험은 하지 못했다. 우린 그저 몽골 국내선 비행기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달보다 손가락이 더 중요한 여행객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내일 비행기 시간에 맞춰 갈 수 있다는 건가요 없다는 건가요? 그냥 일찍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기로 했다.
고집과 명언의 절충으로 이튿날 밝은 새벽의 초원을 지나갔다. 이어 홉스골로 떠나는 무릉공항 행 경비행기 속에서 걸어보지도 않은 초원을 내려다보며,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낀 그 막막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
그것은 유혹과 매혹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이었다.높은 산조차 낮아 보이는 대지를 나는 내 두 다리로 내달리고, 그렇게 내달린 후 지친 몸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바보가 되고 싶었다. 무릉공항에서 홉스골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도그랬다. 차와 비행기가 없이 그냥 갔다면 나는 그게 어떤 위험인지 모르고 달려가다 기꺼이 죽었으리라.
잣나무가 서 있었다
멀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몽골은 바람이 많이 부는 고원지대라 흙이 두껍게 쌓일 수가 없는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어디로 달려가고 넓은 초원을 넘어 사라지기까지 하는 그 흙과 바람처럼 저기 끝없이 구불치는 산맥에 걸친 구름그림자까지 빨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 저 하늘 속의 구름이 가진 그림자로 여기 이 땅 위의 내 몸을 반으로 가를 수 있는 곳에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요동쳤다. 더 나아가 죽을 것처럼 목숨을 다해 달리면 저 먼 극동의 바다에 가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광활(廣闊)
그리고 홉스골로 가는 길 위에서 처음으로 가축 떼와 유목민이 거주하고 있는 하얀 게르를 보았다. 무릉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처음으로 본 그 게르를 지나 또 한참을 가니 다른 게르가 한 채 보이고, 또 저 멀리까지 가야 한 채가 보였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르 속에는 몽골 유목민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감탄해 소리를 질렀다. 고작 유목의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다. 초원을 사는 사람 속에 있는 지혜에 대한 감탄이었다. 오직 초원만이 넓다는 말을 쓸 수 있으며 그 넓음은 구름으로 가릴 수 없다는 지혜, 우리는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넓은 곳에서 어디로 이동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이동할 때에는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내 한 뼘의 몸만큼 가야 하는 것을 아는 지혜. 그 지혜로 유목인들은 살아오고 있었다. 설령 사람이 고집을 부려도 말과 낙타와 소와 양, 염소가 지친다는 게 뭔지 알려줬을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곳이라면 테무친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 몽골땅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언젠가 칭기즈칸이 되었을 것이었다.
어떤 칭기즈칸이 지혜로 저 언덕 너머를 넘어 도착한 해안가를 걷는 상상을 하며 관련된 기록이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부족한 학식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초원의 마성에 미치지 않은 지혜로운 사람이 바다에 도착하여 무엇을 깨달았을지, 문자로 전해받을 순 없었지만 세상에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 지혜가 갈 곳은 많을 것이다. 지혜는 시간에 쫓겨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