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만다, 내가 너 찾아낸다
1. 설탕과 향신료, 그리고 기억의 입자들
작은 여자아이들은 뭘로 만들어졌지?
설탕과 향신료,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
그게 바로 여자아이들이 만들어진 것.
지금 시대엔 안 어울릴지 몰라도, 나는 이 동요가 좋다.
귀여운 단어들이 한데 모여서, 마치 설탕 입자처럼 반짝이니까.
정작 내가 작은 여자아이였을 때는 어땠더라?
낙서와 드래곤볼, 그리고 모든 귀신 이야기들.
나는 그런 것들로 만들어졌다.
친구들이 고무줄 뛰기를 할 때 혼자 잔디밭에서 옆 구르기 연습을 하고,
(정말 못했다. 그래서 울면서 연습했다.)
혼자 소년 만화에 빠져서 연습장에 초사이어인을 그리곤 했다.
반 친구들과 사촌 동생들을 모아놓고는 귀신 이야기를 해줬다.
2. 인형놀이계의 큰손
그럼에도 설탕과 향신료 같은 취미가 있었으니, 인형 놀이였다.
나는 어릴 때 꽤 많은 마론 인형을 모았다.
당시 대세였던 미미인형, 신흥 강자 쥬쥬인형까지.
주말에 친구들한테 전화가 오곤 했다.
"오늘... 우리 집에 와 줄 수 있어?"
"도구 챙겨서 갈게." 업자들처럼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
작은 가방을 꾸려 출장을 갔다.
내가 펼쳐 놓은 것은 인형들과 인형들의 소꿉 살림.
그 당시 나는 인형 침대와 식탁 세트까지 갖춘 인형놀이계의 큰손이었다.
여러 인형 이름 중 내가 가장 좋아한 이름은 사만다였다.
왜인지 그 이름이 어른스럽고 좋았다.
"난 사만다!" 아무도 내 인형 이름을 노리지 않았는데,
항상 놀이를 시작하기 전 그 이름을 외치는 것을 나름의 규칙으로 삼았다.
친구 선미 집에서 전화를 받고 업자 가방을 꾸려간 날,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날이 사만다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인 것을.
3. 마지막 출장
그날따라 선미는 다 놀고 나서 가방을 통째로 빌려달라고 했다.
"하루만 우리 집에 나뚜고 가라. 우리 언니야 하고 가꼬 놀게."
큰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는 인심 좋게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선미 집에 찾아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집에 가서 전화를 해봐도 답이 없었다.
주위 친구들이 말해주고서야 알았다.
"선미, 이사 갔다."
친구네 동 앞, 빈 놀이터 그네에 나는 덩그러니 혼자 앉았다.
시소도, 옆 자리 그네도 그날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별은 종종 생각지도 못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날 나는 사만다를 잃었고, 내 친구 선미를 잃었으며
내 작은 유년 시절의 한 조각을 영영 잃어버렸다.
작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마음은 대체로 영원할 수 없고,
언젠가 작은 사건 사고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4. 이별의 구멍을 꿰매는 일
당시의 충격이나 상실감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통째로 없어진 인형 가방이 몇십 년이 지나도록 한 번씩 생각나는 걸 보면
분명, 내 마음속에 구멍 하나를 만든 사건임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그 이별은 미움이나 좌절로 남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선미를 미워하게 되거나,
테이큰의 아빠처럼 미미를 기필코 추적하지는 않았으니까.
다시 다른 인형을 모으지도 않았다.
어떤 상실은 다음 계단을 만들고,
나는 그 구멍 난 단을 밟으며 조금 어른이 되어갔다.
이별은 늘 아릿한 맛이 난다.
5. 소원 수리 시간
며칠 전 어느 새벽 아침,
불이 꺼져 있어야 할 7살 쌍둥이 딸들 방이 환했다.
방에 가보니 아이들이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왜 이리 일찍 깼어?"
"엄마, 이빨 요정이 내 이 안 갖고 갔어요."
전 날 두희의 아랫니 하나가 처음 빠졌었다.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를 둘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세희는 왜 일어났어?"
"두희가 이빨 요정 올 때 내 선물도 같이 주라고 빌었어요.
나는 태권도 도복 빌었는데..."
음.. 그걸 베개 밑에? 너는 태권도 학원 다니지도 않잖니...
난처한 엄마 얼굴을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말갛다.
두희가 꾸물거리며 말했다.
"엄마, 이빨 요정이 두희 이는 너무 짝아서 안 가지고 갔어요?"
6. 이별을 껴안는 법
순간 나의 인형 가방이 떠올랐다.
아직은 아이들의 마음을 좀 더 지켜주고 싶었다.
불을 끄고 다시 다 같이 누웠다.
"아니야, 이빨 요정이 좀 바빴나 봐.
아빠.. 아니 요정한테 우리 다시 빌어보자."
안겨오는 아이들에게서 설탕과 향신료처럼 달콤한 냄새가 났다.
남은 가을 새벽 속을 더듬어,
쌀알만큼 작은 아이의 이를 드래곤볼처럼 소중하게 챙겨 들었다.
우리는 다시 이빨 요정의 꿈속으로 찾아갔다.
7. 그리고, 가을의 취향
동요는 남자아이 버전도 있다.
작은 남자아이들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개구리와 달팽이, 그리고 강아지 꼬리.
그게 바로 남자아이들이란다.
고백하자면, 이 버전이 더 좋다.
늘 사만다로 변신했던 미미와 쥬쥬와의 이별이
견딜만했던 건, 역시 손오공과 베지터를 더 좋아했던 취향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사만다처럼, 많은 것들이 예고 없이 내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 모든 이별의 입자가 모여
조금 더 단단하고 반짝이는 어른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만난 이별의 계단을,
내 어린 시절 마음으로 같이 건너가 본다.
부디 그들의 마음이 조금만 더, 더디게
순수와 이별하기를.
8. 옆 구르기 하던 그 아이
가을은 언제나 마음의 이별을 꺼내 보게 한다.
달팽이와 강아지 꼬리로 만들어진 남자아이라면
이렇게 생각했겠지.
'이빨 요정, 바빠도 우리 집 먼저!'
'그리고 사만다, 내가 너 찾아낸다.'
물론, 내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속 그 아이는 아마도 그리 다짐하며
가을 잔디밭에서 옆 구르기 연습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이별을 견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