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해서 가면 백만 원, 아파서 가면 천만 원
사실 10년 인지도 몰랐다.
웹툰을 보다가 백만 원을 쓰게 될 줄도 몰랐다.
치과는 늘 '언젠가' 갈 곳이었다.
정확히 언제 갔는지 특별히 헤아려 보지 않았고,
'언젠가'는 아무튼 '지금은' 아니었다.
첫째를 가졌을 때 산전 검진 차원에서
스케일링을 한번 받긴 했었다.
그 첫째가 이제 11살이 되도록 작은 틈 한 번이 없었을까.
많았을 테고, 어쩌면 틈투성이었을 것이다.
핑계는 다양하고도 궁색했다.
첫째 출산, 이사, 이직, 쌍둥이 임신과 출산.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건들 뒤로 치과는 늘 뒷전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사를 와서 치과를 못 정하겠다.
치과가 7층에 있어서 너무 멀다.
오늘은 목이 불편한 옷을 입어서 안된다.
어느 날은 평소보다 못 생겨서 가기 힘들다. 등등
결정적으로,
이가 아프지 않았고,
불편한 곳이 없었다.
임신 직전 충치 치료를 싹 하고
고통스러운 신경치료를 마무리했던 것 역시,
치과를 안(못) 간 이유이기도 했다.
심판의 날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 웹툰을 보던
어느 저녁이었다.
대충 그린 듯한 그림과 성의 없는 펜 선이
너무 취향 저격이라 챙겨보는 웹툰이었다.
주인공이 치과에 갔는데,
크라운 한 잇몸에 염증이 차서 수술할 위기라는 사연이었다.
그림체가 웃겨서 히히 웃고 있는데
날카로운 무언의 계시처럼 어금니가 싸-해져 왔다.
순간 목 뒷덜미도 싸-해졌다.
주인공이 덜덜 떨며
임플란트 치료를 받아야 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는 장면에서는 더 이상 웃음이 나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찬물을 마실 때
이가 싸하게 시리던 참이었다.
'찬물 마시면 누구나 그런 거 아닌가?'
넘어가곤 했던 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었다.
다급히 치과를 검색하고,
바로 다음 날로 예약했다.
"그래도 오랫동안 잘 관리해 오셨네요."
다음 날 치과 의자에 누워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스케일링이 끝난 후,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며 설명을 듣는 중이었다.
첫 화면에 여러 환자의 사진이 보였다.
'흐흥, 치열은 예쁘네.' 남 사진이었다.
'아이고, 저분은 잇몸이 심각하네.' 내 사진이었다.
"여기 잇몸이 심하게 패인 부분 보이시죠?
이 정도면 꽤 시렸을 텐데….
바람 부는 정도에도 시리지 않으셨나요?"
"겨울이라 찬바람 불면 누구나 다 시린 줄 알았어요."를
힘겹게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치경부 마모증입니다.
패인 잇몸에 치아와 비슷한 색의
레진으로 채우는 치료를 하셔야 해요."
"문제는…."
네? 선생님, 이미 큰 문제를 방금 들었는데요?
"마모된 잇몸이 꽤 많네요.
여기 어금니, 옆에도. 위에도 아래도.
하나.. 둘, 셋, 넷... 아…. 열 개…."
그 뒤로 잠시 숙연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금니 뒤쪽에 충치도 하나 있습니다."
나는 혼이 나간 채로 비용 설명을 듣고 치과에서 나왔다.
그 와중에 찬바람에 이가 시려 더욱 서러웠다.
그 뒤, 장장 5회에 걸쳐 치과 치료를 받았다.
그나마도 '한 방에 많이 치료해 달라.'는
나의 요구에 맞춰 한 번에 2, 3개씩 치료한 결과였다.
"오늘 왼쪽 윗니 3개 치료하셨구요.
다음 주에 또 아랫니 2개...."
내가 들어도 웃겨서 '흡!' 웃으면
수납해 주시는 분도 '큽!'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잇몸 마취 주사는 아무리 맞아도 적응이 안 됐다.
“위이이잉. 드르륵드르륵”
얼굴을 덮은 초록색 천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내 영혼의 어딘가를 갉아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현대인의 생각하는 의자라는
치과 의자에 누워 골이 흔들리며 생각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
사실 나는 일을 잘 미루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일을 손에 들고 있지를 못해서,
업무가 생기면 바로바로 쳐내는 스타일이다.
'빨리하고, 빨리 놀자'가 나의 업무 신조다.
이번 치과 진료도, 10년을 미뤘지만
일단 하기로 하고는 20일 만에 다 끝내버렸다.
그리고 겁도 그다지 없다.
위내시경도 시간이 없으면 비수면으로 후딱 한다.
출산 때 자연 분만도, 제왕절개 수술도 그냥 덤덤히 했었다.
유독 치과는 왜 오기까지 10년이나 걸렸을까.
가만히 들여다본 내 마음의 바닥에 있던 감정은,
좀 허탈하게도 '부끄러움'이었다.
어느 순간 시기를 놓친 안일함이 부끄럽고,
게으르게도 관리를 안 한 태평함이 민망했다.
게다가 타인 앞에서 입을 '아' 벌리는 것에는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몸의 외부에 난 상처라면
더 미룰 것도 없이 바로 치료했으리라.
초록색 천 너머로 ‘아’ 하고 벌린 입안에
진짜로 내 영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부디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내밀한 입안을 보이는 행위는
어쩐지 나의 취약한 곳을 보이기 싫은
본능마저 억누르는 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가 싸해서 가면 100만 원,
아파서 가면 1,000만 원.
어디선가 본 듯한 그 말대로
진료비는 정확히 100만 원이 나왔다.
소중히 은닉해 온 비상금을 다 바칠 각오였는데,
이 정도면 선방한 것 같다.
"아~~~"
마지막 진료까지 끝난 날.
마음껏 찬바람을 맞으며
자신 있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금방 편안해질 수 있는데,
어쩐지 나 자신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괜스레 겸연쩍기도 하다.
치아를 복원한 게 아니라,
지난 10년간 돌아보지 않았던,
날 소중히 하는 마음을 복원한 기분이었다.
아차, 다음 정기 검진일이 언제였지?
부끄러움과 맞바꾼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시와 때를 가려 내 마음을 잘 살펴보리라.
집에 가면 캘린더에 정기 검진일을 꼼꼼히 기록해 두어야겠다.
마취 주사 그림도 꼭, 그려 넣어야지.
[다음 주 수요일 연재 예고]
아뿔싸... 치과 옆집은 정형외과였다.
10년 만에 용기 내어 찾은 치과. 그 문을 나서자마자 또 다른 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정형외과에서 뜻밖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