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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욱 Jul 15. 2024

이름이 봄인 여자

 나는 봄의 어느 날 그 호텔에 하루 묶었다. 계절은 봄이었으나 그날은 햇볕이 뜨거워 땀이 제법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호텔에 묶은 첫 날 나는 샤워를 세 번이나 했다. 다음날이 될 때까지 객실의 에어컨을 끄지 않았다.      


 그 호텔을 다시 찾은 것은 한여름의 일이었다. 장마가 근처에 있어 뜨거운 바람 속에 젖은 풀냄새가 가득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탄산수를 연달아 세 개나 주문했다. 두 개째 탄산수를 다 마시고 병을 내려놓았을 때 호텔 로비의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4인용 테이블을 혼자서 쓰고 있었다. 글씨가 쓰인 에코백과 베이지색 가디건을 한 쪽 의자에 걸쳐놓았다. 흰색 원피스를 입고 흰색 컨버스를 신었다. 다 마신 듯 보이는 투명한 커피잔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나는 파란색 표지의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나는 그녀가 신경쓰이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는 척 하면서, 카페의 풍경을 만들고 있는 그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목을 축이러 간 카페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날 밤에는 비가 왔다. 때때로 번개가 치기도 했다. 호텔 로비의 통유리창에 빗방울이 가득 맺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 보았다. 호텔에서 주최하는 와인 시음 행사였다. 4인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나의 일행이라도 되는 듯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행사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글씨가 쓰인 에코백 속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그 모습은 수업을 준비하는 대학생처럼 보였다. 나는 잠자코 먼 곳을 응시하며 내가 그녀를 관찰했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그녀를 전혀 모르는 척했다. 서버가 따라주는 와인을 받으며 나는 곁눈질로 그녀를 훔쳐보았다. 새하얀 피부, 장난기 서린 얼굴표정, 꾹 다문 입술, 점이 있는 코, 무관심해 보이는 눈을 보았다.      

 

 시음회를 진행하는 소믈리에는 계속해서 와인을 권했다. 몇 잔을 마셨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는 계절의 경계를 지우는 일을 해요. 봄에서 여름으로 갑자기 바뀌어버리지 않게. 그래서 봄의 말미는 서서히 덥게 만들고 여름의 초입은 조금 시원하게 만듭니다.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어느 날을 기점으로 봄에서 여름으로 갑자기 바뀌어버려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더이상 모호함을 참지 않게 될 겁니다.”     


 나는 확실히 취했던 것 같다.     


 “모든 계절은 지난 계절을 조금은 품고 있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조금의 봄이, 겨울에는 조금의 가을이 있습니다. 물론 여름에도 조금의 겨울이 있어요. 흐릿해서 잘 보이진 않습니다만.     


 나는 확실히 모든 것이 흐릿했다.     


“보고 있다는 건 보일 수 있다는 거예요. 봄과 보임의 경계를 지우는 일 또한 누군가 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당신 이름이 뭐였죠?”     


 내가 그녀에게 물음을 던질 때 소믈리에가 말했다.     


“이것은 포르투갈의 비뉴 베르데 지역에서 생산된 화이트와인입니다. 비뉴 베르데는 포르투갈어로 그린 와인이라는 뜻이에요. 비뉴 베르데에서 생산된 비뉴 베르데를 드셔보세요.”     


“제 이름은 봄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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