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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라 Sep 26. 2022

서른의 기운 빠진 자기 객관화

서른이라 좋겠다 #6 자기 객관화

퇴사를 하고 반년 정도 지났나... 흠. 분명 굉장히 좋은데.

난 백수가 체질이구나, 하고 느낄 때 즈음.

뭐라도 해야지 싶어서 이것저것 기웃거려보기 시작했다.


마음만은 20대의 열정과 패기 그대로이기 때문에 전문 자격증, 대학원 진학 등 거창한 것들을 먼저 떠올려봤다.

예전의 나였다면 되든 안되든 먼저 강의 등록하고 교재부터 사고 필기구 세팅해서 각부터 잡았을 것이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몽글몽글한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패기 있게 시작하겠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과정에 쓴맛을 맛볼지언정 일단 시작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20대 일지 몰라도, 이성만큼은 30대의 내 몸뚱이와 함께 있어야 할 곳에 잘 자리 잡고 있나 보다.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부터 '보나 마나 교재는 앞부분만 새까맣게 때 타고, 강의도 많아봤자 세 개 정도만 듣고, 만사 귀찮아하며 다 내려놓고 난 침대에 또 누워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모임이 있어서, 명절이 있어서, 휴가를 다녀와야 해서, 아이가 아파서 등등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흐지부지 끝나겠지.

그래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다.


한 단계 눈을 낮춰 조금 가벼운 것 위주로 찾아보기로 했다. 단순히 성취감을 목표로.

한국사 검정시험, 한자 자격증, 영어 말하기 시험 등등 해봤던 가닥이 있어 많이 어색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손쉽다고 생각한 것들 위주.

서점에 들러 자격증 참고서를 둘러보는데 웬일이야.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활자 거부라도 생긴 것처럼 무심코 책을 펼쳤다가 몇 분이 채 되지 않아 바로 덮었다.

아 이것도 쉽지 않네.

취업이든 뭐든 목표가 없으니 선뜻 시작해내기가 참 힘들었다. 취미로 간주하기엔 너무 거창한 듯했다.


아, 이제 마지막 단계에 다다른 듯하다. 그냥 그저 그런 취미생활을 찾아보자.

큰돈을 투자하지 않고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것.

백화점 문화센터나 주민센터에서 진행하는 여러 강좌들이 눈에 들어온다.

강의료도 괜찮다. 꽃꽂이나 요리 같은 건 재료비가 강의료보다 비싼 느낌이 들지만 어차피 그런 손재주는 내 영역이 아니라 등록할 일이 없을 것 같다.

가벼운 운동이나 외국어 회화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있다.

무료한 오전을 소소하게 잘 보낼 수 있겠다.






나는 20대 때 비교적 나 자신에게 집중을 잘했다.

새로운 도전이 눈앞에 있으면 자신감 있게 덤벼들 줄 알았고, 안 되면 한 번 더 해보면 되고, 잘 되면 자기만족을 마음껏 누렸다.

그런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확고한 취향, 한계, 약점 등 부정적인 것 위주로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게 되어 버렸는데, 이게 독인지 약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말 그대로 '자기 객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말이 좋아 자기 객관화지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직장생활 및 사회생활이 무르익으면서 더 이상 아마추어같이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나름대로 잘 해내던 것도 월등히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 이건 내 길이 아니구나' 싶고, 사소한 실수라도 반복되다 보니 스스로 위축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20대 때 주야장천 찍어냈던 자기소개서의 항목 중 '자신의 장단점을 서술하시오' 중에서 '단점', '자신의 한계점을 잘 극복한 사례에 대해 서술하시오' 중에서 '한계점'에 대한 대답을 솔직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취업용이든 아니든 아주 솔직하게 객관적으로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단점이 가장 단점 같지 않아 보일까 고민하며 포장된 내 단점 말고.


어느 정도 내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던 중 남자 사람 친구로부터 '넌 너 자신을 꽤 객관적으로 잘 보네'라는 오묘한 말을 들었는데, 마치 '넌 네 주제를 잘 파악하는구나'로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꼬아 듣는 것을 보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자기 객관화'가 아니라 '자기 비관'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좋든 아니든 30대 때 자기 객관화가 시작되었다면, 과연 40대엔 더 깊어져 완전 남의 시선으로 자신을 냉정하게 잘 바라볼 수 있으려나.

마흔, 불혹(不惑)의 진정한 의미답게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지 않고 판단을 흐리지 않는 나이를 잘 맞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까딱 잘못했다간 이 30대의 자기 객관화를 거쳐서 오히려 더 강한 가치관, 주관적인 철학이 형성되어 고집만 한 풀 더 세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지금은 더 고집 센 나를 만나기 위한 중간과정에 그치지 않고 현명하게 마흔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아주 잘 돌아봐야 할 거 같다. 무조건 비관만이 답이 아니고, 무조건 내 말이 맞다고 우기는 것 또한 답이 아닐 것이다.


점점 만나는 사람만 만난다. 내 취향, 내 성격에 맞는, 나한테 편한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인간관계도 좁아진다. 이러다 정말 나이만 들어가는 고집 센 아줌마로 남게 될 것 같아 두렵다. 사람들도 좀 만나고, 뭐라도 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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