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처럼 Feb 28. 2024

<1> 천국은 오직 사랑의 결합 속에
존재한다

-사랑의 이유

-사랑은 그 자체 기쁨과 쾌락의 원천 

-사랑의 성공 여부는 열정에 달렸다 


 

 “나는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 그 첫째 이유는 사랑이 크나큰 희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외로움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셋째 이유는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려온 천국의 모습이 사랑의 결합 속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그것은 신화이자 생명이며 진리이다. 인간 사회가 지속되는 것은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80억 인간 생명체는 모두 사랑의 선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타인을 갈망한다. 혼자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혼자는 결핍이며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과의 감정적 소통과 육체적 스킨십을 그리워한다. 타인을 갈망하다 그 사람에게서 특별한 매력이 발견되는 순간 사랑이 불꽃을 피우게 된다.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사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곳을 천국이라고 했다. 그는 90대 후반, 그러니까 죽음을 앞둔 시점에 출간한 자서전의 서문에 자신이 일평생 사랑을 찾아 나선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서두에 소개한 글이 그것이다. 희열을 가져다주고, 외로움을 덜어주며, 천국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러셀은 철학자로서는 보기 드문 사랑꾼이었다. 자유연애를 즐기며 결혼을 네 번이나 했다. 데카르트, 칸트, 파스칼, 스피노자, 니체, 쇼펜하우어, 비트겐슈타인 등 저명한 철학자들이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마지막 네 번째 결혼은 80세 때의 일이다. 평생 사랑을 갈구하고, 또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한껏 즐긴 나머지 그의 각종 저서에는 사랑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 깊숙이 배어있다.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과 ‘결혼과 도덕(Marriage and morals)’이 대표적이다.


그는 사랑을 소중히 여겨 그것을 찾아 헤맨 가장 큰 이유로 희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고 지목했다. 사랑이 주는 희열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 남은 인생을 모두 바쳐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고 고백한다. 사랑은 그 자체가 기쁨을 빚어내는 원천이기 때문에 더없이 소중하다고 했다. 반대로 사랑이 없다는 것은 고통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철학자는 진단한다.


러셀은 또 사랑이 아름다운 음악과 높은 산에서 감상하는 해돋이, 보름달 아래 펼쳐진 바다와 같은 최상의 쾌락을 증폭시키기 때문에 소중하다고도 했다. “사랑은 생물학적 협력의 방식으로 남녀 두 사람에게서 자아의 껍질을 깨뜨릴 수 있다.” 사랑은 상호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최초의 감정이자, 가장 보편적인 감정 형식이라는 게 철학자의 생각이다.


그렇다. 사랑은 그 자체로 기쁨의 완전체라 할 수 있다. 오감을 자극하는 설렘과 환희, 생기가 한데 어우러진 마음이다.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삶은 당연히 불행하다. ‘사랑이 곧 인생’이라는 소설가 괴테의 노랫말은 누가 뭐래도 진리이다 “사랑이 없는 인생,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삶은 하찮은 환등기가 비춰주는 쇼에 지나지 않는다.” 괴테가 한 말이다.


나는 오스트리아 작가 프리드리히 할름의 사랑 묘사를 특별히 좋아한다. “사랑이란 하늘에서 우리를 이끌어가는 별이며, 메마른 황야에서는 한 점의 초록색이며, 회색의 모래 속에 섞인 한 알의 금이다.” 세상에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가 담긴 표현이다.


러셀은 사랑을 소중히 여긴 두 번째 이유로 외로움을 덜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는 첫 번째 이유와 일맥상통한 면이 없지 않지만 사랑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다. ‘혼자’의 결핍과 불편함을 극복하려고 추구하는 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러셀은 영국의 최고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 잇따라 부모를 잃는 바람에 성장기 내내 외로움에 떨어야 했다.


노년에 그가 떠올린 ‘외로움’이란 단어는 이런 것이었다. “나의 외로움은 이 세상 언저리에서 깊고 차디찬 바다 밑을 들여다보며 몸서리치게 만드는 지독한 것이었다.” 20대 초반 처음 결혼한 이후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지만 평생 아내와 더불어 생활한 사람이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성장기 외로움의 상처가 남달리 컸던 모양이다.


러셀에게 사랑이란 인간이 긴 생애 대부분을 통해 겪는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냉혹한 세상과 잔인한 대중에 대해 뿌리 깊은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열정적인 사랑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런 감정이 소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아라는 단단한 벽을 부수고 두 사람의 연인으로 이뤄진 하나의 새로운 존재를 낳게 된다.”


세상은 인간이 혼자서는 외로움을 지탱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러셀은 보았다. 인간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자연이 명령하는 생물학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또 문명사회의 인간이라면 사랑 없이는 성적 본능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외로움은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통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는 게 러셀의 진단이다. 


그렇다. 사랑은 타인과의 친밀감을 경험함으로써 외로움과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통로임에 분명하다. 외로움은 인간의 근원적 특성이다. 모든 인간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아무리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아도 외로움은 남는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다. 외로움은 사랑을 간절히 소망한다. 누구나 외로움을 따뜻이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사랑을 키워나가야 한다.


러셀은 자신이 사랑을 소중히 여긴 또 하나의 이유로 천국의 모습이 사랑의 결합 속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누구나 그곳에 가고 싶어 할 것이다.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불멸의 낙원 아닌가.  


러셀의 말처럼 성인과 시인은 천국의 모습을 즐겨 그린다. 화가도 마찬가지다. 천국은 죽어서의 천국이 있는가 하면, 살아서의 천국도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는 대표작 ‘천상과 세속의 사랑’에서 사후 천국과 현생 천국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 옆에 놓인 보석 담긴 꽃병은 현생에서의 짧은 행복을 뜻하고, 나체의 여인이 들고 있는 검은 기름등잔은 사후 천상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러셀은 20세기 영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절대자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의견을 가진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였다. 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없다는 증거도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 말이다. 철학자다운 발상이며, 사실상 불신자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을 통해 천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세상 만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따지는 철학자지만 사랑이 없는 천국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기한테 종교가 있든 없든 천국은 사랑의 왕국이라고 해야겠다. 또 사랑이 충만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불러야겠다.


불신자인 러셀은 아마 사후 천국보다 현생 천국을 더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현생의 천국에는 신도 없으니 사랑 그 자체 아닐까? 사랑 말고 천국을 그릴 수 있는 색연필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러셀은 자서전에서 결국 사랑을 찾아냈다고 선언했으니 살아서 이미 ‘사랑의 천국’을 맛본 셈이다.


러셀이 말하는 ‘사랑의 천국’은 당연히 로맨틱 사랑을 포함한다. 그는 자유연애 지지자인 동시에 로맨틱 사랑 예찬론자였다. 또 그 두 가지를 실천한 사람이다. “나는 로맨틱 사랑이야말로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강렬한 기쁨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열정과 상상, 부드러움을 통해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는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는 사회의 잘못된 인습과 제도가 로맨틱 사랑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사랑과 관련한 그의 인습 타파 및 제도 개선 주장은 교회와 대학으로부터 숱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76세 때 세 번째 이혼, 80세 때 네 번째 결혼을 강행한 것은 이런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러셀의 잦은 이혼과 재혼이 칭송받을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그의 사랑은 대부분 결혼생활 안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보다 100년 가까이 먼저 살다 간 영국 시인 조지 바이런이나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의 그것과는 사뭇 성격이 다르다. 바이런은 비난받아 마땅한 바람둥이였고, 상드는 무책임한 남성 편력자였다.


아무튼 러셀은 사랑에 성공했다. 그것은 열정의 산물이라 여겨진다. 사랑을 향한 그의 열정은 지식에 대한 그것 못지않게 강렬했다. 그는 일과 경제적 성공을 위해 사랑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연애 때문에 출세를 완전히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출세를 위해 사랑을 전적으로 희생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둘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하되 열정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러셀의 이런 생각은 한 세대 후배 철학자 에리히 프롬에게 이어진 듯하다. 사랑은 다분히 노력의 산물이라는 데 두 사람의 의견은 완전히 일치한다. 사회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적극적 활동이며 능력이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은 동서고금 예외가 없는 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90>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