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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정 Feb 03. 2022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아이돌을 너무 사랑해버려서


 누군가 나의 취미를 물으면 나는 딱히 취미가 없다는 답을 한다. 어릴 때 좋아했던 만화책을 사모으기도 해. 가끔 담금주를 만들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지.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써. 음악 감상도 좋아하는 편이야.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해. 사진기 자체도 좋아하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좋아하는 게임은 있지. 영화는 잘 못 보는데도 좋아하는 영화는 수십 번 돌려보고. 아, 요새는 밥 차리는 게 좋더라. 그렇게 대답이 흩어질 때쯤, 가까운 사람들은 나를 한번 찌른다. 너 아이돌 쫓아다니잖아.


 나는 아이돌을 좋아했고, 좋아한다. 방청에 들어가기 위해 몇 시간씩 길바닥에 앉아있었고, 팬싸인회에 가겠다며 앨범 수십장을 샀고, 사진을 찍기 위해 아침부터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앞줄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구성이 똑같은 콘서트를 매회차 갔고, 생일이나 기념일에 선물을 보내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돈을 모았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참여할  있는  활동의 영역이 줄어들며 많이 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 있다.


 아이돌 산업이 확장되면서 아이돌 그룹의 수명 역시 늘어났다. 표준계약 7년을 채우는 그룹이 드물던 시기를 지나, 7년을 끝으로 마무리 되는 그룹들보다 7년 이상을 바라보는 그룹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아이돌 팬들에게 하나의 트라우마로 떠오르는 단어가 생겼다. '재계약'. 표준 계약기간인 7년이 지난 후 아이돌그룹의 모든 멤버들이 기존 소속사에, 더 나아가 기존 팀에 남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팀을 유지하게 되더라도 소속사가 달라지면 단체 활동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팬들은 멤버 전원의 재계약을 바란다. 아이돌들도 7년이나 그룹을 하다보면 각자의 지향점이 달라지기 마련이라, 전원 재계약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역시 전원 재계약에 실패했다. 팀은 유지하기로 했지만, 이전과 같이 활발한 그룹활동은 없을게 확실하다.

 

 아이돌 그룹의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지만 평생   있을만큼 길지는 않다. 당연히 그룹 이후의 행보에 대해 개개인마다 다른 생각을 가질  밖에 없다. 내겐 감정이 섞인 취미일 뿐이지만 그들에겐 인생이기에, 얼마나 좋아하고 어떤 소비를 했던간에 그들의 선택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다. 자신의 기대와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쳤고,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한다면 어떤 행보를 보이든간에 응원해야지, 하고. 하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활동이 불투명해지자 나는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었다. 당연히 선택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묘하게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가졌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는 건 멤버 하나하나를 다 좋아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개인이 아닌 그룹이기 때문에 가지는 요소가 분명 있고, 그 부분을 사랑하게 만드는 산업에 처절하게 낚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그룹만이 가지는 요소를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대상은 사라지려 하고 있다. 감정이 향할 대상을 잃었으니 혼란스러울 수 밖에. 멤버 한 사람 한 사람 좋아했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해 내가 겪는 감정은 오롯이 내 몫이고 감정마저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이 감정을 곱씹어 보다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라는 노래 제목을 떠올렸다. 연애감정이 아닌 취미의 영역에 속하는 감정이라고 해서 무게가 가벼울 수만은 없다. 특히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건 팬이든 아이돌 당사자든 일방적인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어 더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 노래 제목같은 마음이 든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별이라는 선택까지 사랑할 수는 없다. 내가 해야하는 건 이해가 아니라 수용이다. 끝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한 댓가는 내가 치러야할 몫이다.


 나는 항상 이별을 두려워한다. 아직 어려서일까, 이별의 경험이 적어서일까. 어쩌면 사랑이 많아서일까. 모든 일에는 끝이 있지만 나는 그걸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사랑부터 했다. 사람을 물건을 행동을 시간을 섣불리 사랑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에 "사랑이 많은 건 전혀 잘못이 아니"라는 가사가 나온다. 정말 그럴까. 나는 가끔 사랑이 많은 게 잘못이었으면 바란다. 사랑을 잃었을 때 겪어야할 고통들이 사랑이 많은 죄에 대한 벌일 수 있게. 하지만 정말로 사랑이 많은 건 전혀 잘못이 아니라서, 우리는 벌도 아닌 고통을 받아야한다. 그래서 거듭 연습해야한다. 사랑하지 않기. 사랑할 수 밖에 없다면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진심을 쏟지 않으려하고 다음을 기대 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한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실은 이 글을 쓰는 것도 상처받지 않기 위한 거리두기의 한 방향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은 전원 재계약에 실패했지만, 앞으로 예정된 그룹 활동이 있고 향후 1~2년은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룹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다른 경우에 비하면 좋은 선례로 남을 만큼 긍정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닐' 것임은 확실하고, 1~2년 후 달라질 상황에 또다시 타격을 받고 싶진 않기에 나는 일부러 최악을 생각하려 한다.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기대는 말아야한다. 기대는 상처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사랑을 하지 않게 되는 순간보다 이별에 무뎌지는 순간이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아니, 이별에 무뎌질 수 없게 내게는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별할 걱정없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으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음을 알기에, 꾸준히 사랑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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